자식 빼앗겨 '강제 이별'…마흔에 모든 걸 잃은 그녀의 정체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3 hours ago 3

'화장대 앞 자화상'(1909).  / 모스크바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화장대 앞 자화상'(1909). / 모스크바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엄마, 다녀올게요. 얘들아, 금방 올 테니까 할머니 말씀 잘 듣고 있어라.”

1924년 8월 어느 아침,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기차역. 해외 출장을 떠나는 마흔 살의 여성은 배웅을 나온 어머니와 네 명의 아이에게 인사했습니다. 두세 달 정도의 출장 일정이었습니다. ‘빨리 일을 마치고 돌아와야지.’ 그녀는 다짐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몰랐습니다. 이 이별이 터무니없이 길어질 거라는 사실을. 큰아들, 큰딸과는 30여년 뒤에야 만나게 되고, 어머니와는 다시는 만나지 못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녀의 이름은 지나이다 세레브랴코바(1884~1967). 러시아 문화계 최고 명문가에서 태어난 외동딸이었고, 스물다섯에 그림 하나로 러시아 미술계의 별이 된 행복한 여성이었습니다. 모두가 그녀를 부러워했습니다. 하지만 마흔 살의 그녀는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세레브랴코바의 삶과 이별, 그리고 작품에 관한 이야기.

그림에 담은 싱그러운 젊음

세레브랴코바는 러시아에서 제일가는 '문화 명문가' 출신이었습니다. 대대로 러시아 미술·건축 대가들을 배출한 귀족 집안이었지요. 세레브랴코바는 어린 시절부터 러시아 최고 발레 무대인 마린스키 극장을 다니며 발레, 음악, 무대미술에 익숙해졌습니다.

집안 덕분에 그녀는 화가가 되기 위한 최고의 엘리트 코스를 밟을 수 있었습니다. 열일곱 살이던 1901년 사립 미술학교에 들어가 거장 일리야 레핀에게 그림을 배우기도 했고, 2년간 이탈리아 유학을 다녀오기도 했지요. 스물한 살이던 1905년 결혼한 뒤에는 프랑스 파리로 신혼여행을 가 모네, 마네, 시슬레, 드가의 작품을 보고 영감을 받았습니다.

'롤라 브라스의 초상'(1910). 그녀가 1903~1905년 사사했던 초상화가 오시프 브라스 가문의 인물을 그린 작품. 에르미타주 미술관의 옛 거장들을 모사하며 다진 그녀의 사실주의 화풍이 잘 드러난다. / 개인 소장

'롤라 브라스의 초상'(1910). 그녀가 1903~1905년 사사했던 초상화가 오시프 브라스 가문의 인물을 그린 작품. 에르미타주 미술관의 옛 거장들을 모사하며 다진 그녀의 사실주의 화풍이 잘 드러난다. / 개인 소장

'가을 곡식의 새순'(1908). 우크라이나 영지 네스쿠치노예에서 그린 초기 풍경. 그녀가 훗날

'가을 곡식의 새순'(1908). 우크라이나 영지 네스쿠치노예에서 그린 초기 풍경. 그녀가 훗날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라고 회고한 그 시절의 들판이다. / 개인 소장

결혼 이후 12년 동안 세레브랴코바는 차례로 네 명의 아이를 낳고 기르며 짬짬이 그림을 그렸습니다. 생활은 풍요로웠고, 걱정할 건 없었습니다. 훗날 그녀는 이 때를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라고 회고했습니다. 그의 대표작도 이 시기 나왔습니다.

"겨울에 눈이 많이 왔다. 정원도 들판도 길도 모두 눈에 덮였다. 모델을 세운 뒤 그림을 그리려고 했는데 눈 때문에 모델을 부를 수가 없어서, 화장대 앞에 앉아 나 자신을 서둘러 그렸다." 폭설로 모델을 만나지 못하자 스물다섯 살의 화가는 거울 앞에 앉아 머리를 빗는 자신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흰색 잠옷 같은 옷이 한쪽 어깨에서 살짝 흘러내려 있고, 화장대 위에는 향수병과 보석함이 어지럽게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거울 속의 자신을 응시하며 빙긋이 웃고 있습니다. 그림 곳곳에서 싱그러운 젊음의 생기가 넘쳐흐릅니다. '화장대 앞 자화상'(1909)입니다.

2009년 러시아가 발행한 우표. '화장대 앞 자화상'을 도안으로 썼다.

2009년 러시아가 발행한 우표. '화장대 앞 자화상'을 도안으로 썼다.

이 작품이 전시에 나오자 반응은 폭발적이었습니다. 러시아 최고 미술관이었던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은 이 작품을 즉시 구입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평론가들은 작품을 극찬했습니다. "그녀는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통해 영원을 응시한다." 이 한 점의 자화상으로 그녀는 러시아 미술계의 스타가 됐습니다.

이후 수년간 그녀는 농촌 여성들의 위대함을 소재로 그림을 그리며 화가 인생의 전성기를 보냈습니다. 러시아 미술 아카데미가 그녀를 러시아 역사상 최고의 여성 화가 중 하나로 평가할 정도였습니다. 이 시기 그녀는 가족을 그린 그림도 한 점 남겼습니다. 1914년의 '아침식사'. 따뜻한 햇볕이 비치는 식탁에 자녀들이 둘러앉아 있고, 백자 그릇과 흰 식탁보가 있는 평화로운 가족 장면입니다. 이 환한 그림은, 안타깝게도 그녀가 평화롭게 그릴 수 있었던 마지막 그림이었습니다.

'아침식사'(1914). 식탁에 둘러앉은 세 자녀의 모습. 1917년 혁명이 모든 것을 무너뜨리기 전, 그녀가 평화롭게 그릴 수 있었던 마지막 가족 그림이다. / 모스크바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아침식사'(1914). 식탁에 둘러앉은 세 자녀의 모습. 1917년 혁명이 모든 것을 무너뜨리기 전, 그녀가 평화롭게 그릴 수 있었던 마지막 가족 그림이다. / 모스크바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수확'(1915). 우크라이나 영지에서 그린 한여름 풍경. 농촌 여성들의 모습을 부각시켰다. / 오데사 국립미술관

'수확'(1915). 우크라이나 영지에서 그린 한여름 풍경. 농촌 여성들의 모습을 부각시켰다. / 오데사 국립미술관

혁명이 무너트린 행복

1917년 터진 러시아 혁명으로 황제가 쫓겨났습니다. 새로 들어선 정권은 귀족과 부자들의 재산을 빼앗아 사람들에게 나눠줬습니다. 세레브랴코바의 삶도 함께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혁명의 광기에 휩싸인 농민들은 그녀의 집안 영지에 불을 질러 모두 태워버렸습니다. 가문의 재산과 여름마다 그녀가 그림을 그리던 들판이 통째로 잿더미가 됐습니다. 그나마 평소 세레브랴코바의 가문이 농민들에게 잘해준 덕분에 목숨은 건질 수 있었습니다. 슬픔도 잠시, 더 큰 비극이 찾아왔습니다. 남편 보리스가 당국에 끌려가 심문을 받다가 병에 걸려 숨을 거둔 겁니다. 이제 서른다섯 살의 그녀는 혼자 힘으로 병든 어머니와 네 아이를 먹여 살려야 했습니다.

'사과나무'(1910년대). 영지 네스쿠치노예의 사과나무 한 그루를 그린 풍경화. 매년 여름 그녀가 가족과 머물던 그곳은 1918년 농민들의 방화로 통째로 잿더미가 된다. / 개인 소장

'사과나무'(1910년대). 영지 네스쿠치노예의 사과나무 한 그루를 그린 풍경화. 매년 여름 그녀가 가족과 머물던 그곳은 1918년 농민들의 방화로 통째로 잿더미가 된다. / 개인 소장

'빨래 표백'(1917). 강가에서 빨래를 너는 농촌 여성 셋. 화면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본 시점 덕에 평범한 농민이 위대해 보인다. 그녀의 농촌 연작 정점이자, 혁명 직전 그린 마지막 작품. / 모스크바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빨래 표백'(1917). 강가에서 빨래를 너는 농촌 여성 셋. 화면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본 시점 덕에 평범한 농민이 위대해 보인다. 그녀의 농촌 연작 정점이자, 혁명 직전 그린 마지막 작품. / 모스크바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세레브랴코바가 할 수 있는 건 그림을 그리는 것뿐이었습니다. 당시 러시아 미술계는 말레비치의 절대주의로 대표되는 추상화를 주로 그렸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 고위 공산당원들의 초상화를 그리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스스로 이해할 수 없는 추상화를 제대로 그리고 판매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가족의 행복을 박살낸 공산당원의 초상화를 그리는 것도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박물관 도감의 삽화를 비롯해 잡다한 그림을 그리며 가족을 먹여살렸습니다.

'카드의 집'(1919)은 이 시기 그린 작품입니다. 어두운색의 옷을 입은 네 아이가 모여 카드를 한 장씩 쌓고 있습니다. 옆엔 시든 꽃과 망가진 인형이 놓여 있습니다. 바람이라도 후 불면 무너질 카드의 집. 5년 전 '아침 식사'에서 햇살 아래 둘러앉아 있던 그 환한 가족은 이렇게 변했습니다.

'카드의 집'(1919). 어두운 옷을 입은 네 아이가 카드로 집을 쌓고 있다. 옆엔 시든 꽃과 망가진 인형. 5년 전 '아침식사'와 대비되는, 남편을 잃은 직후 그린 작품이다. /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 미술관

'카드의 집'(1919). 어두운 옷을 입은 네 아이가 카드로 집을 쌓고 있다. 옆엔 시든 꽃과 망가진 인형. 5년 전 '아침식사'와 대비되는, 남편을 잃은 직후 그린 작품이다. /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 미술관

배우자도 없이 어머니와 네 아이를 홀로 먹여 살리고 돌보며 그녀는 지쳐갔습니다. 세레브랴코바는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썼습니다. “쓰라리고 슬프다. 내 인생은 이미 지나갔고, 시간은 흘러간다. 내 앞에는 외로움과 늙음, 그리움밖에 없다. 어디로든 떠나고 싶다.”

하지만 그녀는 이런 마음을 달래 가며 그림을 그렸습니다. 1920년, 그녀에게 한 줄기 행운이 찾아왔습니다. 큰딸 타티아나가 마린스키 발레학교에 합격한 겁니다. 어머니인 세레브랴코바는 덕분에 발레리나들의 분장실을 드나들 수 있게 됐지요. 그리고 그녀는 발레리나들을 그렸습니다. 토슈즈 끈을 묶는 무릎, 거울 앞에서 무대 의상을 매만지는 어깨, 분장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옆모습…. 신혼 시절, 남편과 함께 파리에서 드가의 발레리나 그림들을 들여다보던 그 때의 행복한 시절을 떠올리며.

 눈송이들'(1923). 차이콥스키 '호두까기 인형'의 '눈송이의 춤'을 준비하는 발레리나들. 큰딸 타티아나의 마린스키 발레학교 합격 덕에 그녀가 분장실을 드나들 수 있게 된 시기의 작품이다. /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 미술관

'발레 분장실: 눈송이들'(1923). 차이콥스키 '호두까기 인형'의 '눈송이의 춤'을 준비하는 발레리나들. 큰딸 타티아나의 마린스키 발레학교 합격 덕에 그녀가 분장실을 드나들 수 있게 된 시기의 작품이다. /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 미술관

출장, 수십 년이 되다

그러던 1924년의 어느날, 파리에서 한 통의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큰 벽화 한 점을 그려달라는 의뢰였습니다. 마침 세레브랴코바의 외삼촌도 파리에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두세 달, 길어도 반년이면 일을 마치고 돌아올 수 있는 출장이었지요. 그녀에게는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었습니다. 세레브랴코바는 가족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기차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파리에 도착하고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일이 꼬였습니다. 소련 정부가 출입국을 강하게 통제하기 시작한 겁니다. 세레브랴코바는 가족들을 데려오려 했습니다. 하지만 소련 정부는 “전부 데려갈 수는 없다”고 막았습니다. ‘외화를 벌기 위해 예술가가 해외 출장을 가는 것까지는 괜찮다. 하지만 가족을 전부 데려가게 하면, 러시아를 떠나 외국에 정착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망명을 막고 예술가를 다시 돌아오게 하기 위해 가족을 인질로 묶어둬야 한다’는 게 소련의 방침이었습니다.

그래도 세레브랴코바는 가족을 데려오려고 안간힘을 썼습니다. 적십자사가 도움을 준 덕분에 어린 둘째 아들과 막내딸은 파리로 데려올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큰아들 예브게니와 큰딸 타티아나, 그리고 어머니는 끝내 소련을 빠져나오지 못했습니다.

'딸 카테리나의 초상'(1930년대). 1928년 적십자의 도움으로 파리에 합류한 막내딸을 그린 초상. 카테리나는 평생 어머니의 작업과 가사를 도왔고, 어머니 사후엔 작품 보존을 위한 세레브랴코바 재단을 파리에 세웠다. / 개인 소장 또는 파리 세레브랴코바 재단

'딸 카테리나의 초상'(1930년대). 1928년 적십자의 도움으로 파리에 합류한 막내딸을 그린 초상. 카테리나는 평생 어머니의 작업과 가사를 도왔고, 어머니 사후엔 작품 보존을 위한 세레브랴코바 재단을 파리에 세웠다. / 개인 소장 또는 파리 세레브랴코바 재단

그녀는 러시아 출신 망명자들의 초상화를 그려주며 근근이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수입의 대부분은 소련에 있는 가족에게 송금했습니다. 그리고 남은 돈으로는 파리에 함께 있는 두 아이를 먹이고 입혔습니다. 1933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도 그녀는 임종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1940년 6월, 나치 독일이 파리를 점령하면서 그녀에게 또 다른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남은 두 자녀와 주고받은 편지가 점령군에 의해 '적국과의 통신'으로 분류된 겁니다. 강제수용소에 끌려갈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살아남기 위해 세레브랴코바는 소련 시민권을 포기했습니다. 이로 인해 그녀가 다시 러시아 땅을 밟을 가능성은 끊어졌습니다.

'잠자는 농촌 소녀'(c. 1917). 두 손을 머리 아래 받친 채 잠든 농촌 소녀를 그린 작품. 2015년 런던 소더비 경매에서 추정가의 6배가 넘는 약 65억원에 낙찰돼 그녀의 작품 최고가 기록을 세웠다. / 개인 소장

'잠자는 농촌 소녀'(c. 1917). 두 손을 머리 아래 받친 채 잠든 농촌 소녀를 그린 작품. 2015년 런던 소더비 경매에서 추정가의 6배가 넘는 약 65억원에 낙찰돼 그녀의 작품 최고가 기록을 세웠다. / 개인 소장

이 시기 그녀를 붙잡은 건 그림이었습니다. 계속 농촌 여인과 아이들, 발레리나, 자화상, 풍경을 그렸습니다. 그림을 그릴 때만큼은 그녀가 잃어버린 세계가 다시 그녀 곁에 살아나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세레브랴코바는 하루하루를 살아냈습니다.

마침내 만난 딸

1953년 소련을 철권통치하던 스탈린이 죽었습니다. 소련의 분위기도 조금씩 풀렸습니다. 소련 국민과 외국으로 간 망명객의 접촉도 조금씩 허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덧 세월은 흘러 60대에 접어든 세레브랴코바. 그녀에게 1960년 한 여성이 찾아왔습니다.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무대미술가가 된 큰딸이었습니다. 1924년 8월의 그날, 상트페테르부르크 기차역에서 어머니를 배웅하던 열두 살의 그 아이가 마흔여덟이 되어 어머니를 찾아온 겁니다. 일흔여섯의 어머니와 마흔여덟의 큰딸은 부둥켜안고 한참 눈물만 흘렸습니다.

4년 뒤 큰딸은 다시 파리를 찾았습니다. 이번에는 소련에서 열리는 어머니의 회고전을 준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모녀가 함께 어떤 그림을 소련으로 보낼지를 골랐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마침내 세레브랴코바 본인이 41년 만에 고향 땅을 밟았습니다. 그녀의 회고전은 1965~1966년 2년에 걸쳐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 키예프에서 잇따라 열렸습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습니다. 화집은 수백만 부 팔렸습니다.

1967년 큰아들이 큰딸과 함께 파리에 왔습니다. 세레브랴코바는 마침내 43년 만에 큰아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해 9월 19일, 그녀는 8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파리 근교 러시아인 묘지에 묻혔습니다.

'농부들'(1914). 야외에서 빵과 우유로 점심을 먹는 두 농민 부부. 1914~1917년 그녀가 매달렸던 농촌 연작 중 한 점으로, 평범한 농민을 거대한 화면에 고대 그리스 여신과 같은 분위기로 그렸다. /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 미술관

'농부들'(1914). 야외에서 빵과 우유로 점심을 먹는 두 농민 부부. 1914~1917년 그녀가 매달렸던 농촌 연작 중 한 점으로, 평범한 농민을 거대한 화면에 고대 그리스 여신과 같은 분위기로 그렸다. /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 미술관

사실 미술사에서 세레브랴코바의 자리는 좀 애매합니다. 그녀는 다른 러시아 화가들처럼 추상화나 사회주의 리얼리즘 그림을 그리지 않았습니다. 서구 미술계에 녹아든 것도 아닙니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채로 그녀는 사람의 얼굴, 농촌 여인의 어깨, 발레리나의 등을 끝까지 그렸습니다. 시대를 대표하거나 앞서가기는커녕 자기가 살았던 옛 시대를 자신의 시선으로 끝까지 그렸을 뿐입니다. 그래서 그녀의 이름은 미술사 교과서에 등장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의 그림은 점점 더 많은 사람을 끌어모읍니다. 세레브랴코바는 러시아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여성 화가 중 한 명으로 꼽힙니다. 2017년 모스크바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에서 열린 대규모 회고전을 비롯해 그녀의 전시에는 언제나 관람객의 줄이 끊이지 않습니다. 미술시장에서도 그녀의 작품은 인기가 많습니다. 대부분 작품이 미술관에 소장돼 있어 시장에 잘 나오지는 않지만, 11년 전 런던 소더비 경매에서 그녀의 '잠자는 농촌 소녀'는 추정가의 6배가 넘는 약 65억원에 낙찰돼 화제를 모았습니다.

거창한 이론이나 이데올로기가 없는데도 그녀가 이토록 사랑받는 이유는 뭘까요. 그녀의 그림에는 한 사람이 살아낸 삶이 담담히 그려져 있습니다. 거울 앞에서 머리를 빗는 젊은 여성의 자신감, 아이들의 행복과 슬픔, 농촌 여인의 그림에 담긴 고향에 대한 그리움 같은 것들. 행복했던 시기의 그림에는 행복이 그대로 녹아 있고, 어려운 나날의 작품에는 힘겹게 하루를 살아낸 용기가 들어 있습니다.

한때 시대를 풍미했던 러시아 절대주의의 검은 사각형도, 세상을 흔들었던 사회주의 리얼리즘도 이제는 모두 미술사 책의 한 자리에 박제됐습니다. 역사에 없었던 혁신이었다는 점에서 그들의 그림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가치가 있지만,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더 이상 감동이나 충격을 주지는 못합니다.

러시아의 거장 카지미르 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1915). 그림에서 일체의 구체적 형상을 제거하고 검은 사각형만을 남긴 작품. 순수함과 단순함을 극단적으로 밀어붙인 '절대주의(Suprematism)'의 대표작. 러시아의 국보급 회화로 꼽힌다. / 모스크바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러시아의 거장 카지미르 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1915). 그림에서 일체의 구체적 형상을 제거하고 검은 사각형만을 남긴 작품. 순수함과 단순함을 극단적으로 밀어붙인 '절대주의(Suprematism)'의 대표작. 러시아의 국보급 회화로 꼽힌다. / 모스크바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미술사의 그 거창한 페이지들 사이에서, 한 세기를 가만히 견딘 그녀의 평범한 그림들이 지금 사람들 앞으로 다시 걸어 나오고 있습니다. 인간에게 가장 감동적인 예술은 결국 인간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1911년의 자화상.

1911년의 자화상.

'자화상'(1930년대). 파리 망명 시기의 자화상. 거울 앞에서 빙긋이 웃던 1909년의 화가가 30년 가까이 흐른 뒤 변한 모습을 보여준다. / 개인 소장

'자화상'(1930년대). 파리 망명 시기의 자화상. 거울 앞에서 빙긋이 웃던 1909년의 화가가 30년 가까이 흐른 뒤 변한 모습을 보여준다. / 개인 소장

*이번 기사는 Zinaida Serebriakova (State Tretyakov Gallery), My Reminiscences (Alexandre Benois 지음) 등을 참조해 작성했습니다.

자식 빼앗겨 '강제 이별'…마흔에 모든 걸 잃은 그녀의 정체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그때 그 사람들> 명화 시리즈의 완결편, <명화의 완성, 그때 그 사람> 출간이 임박했습니다. 시리즈와 별개로 연재는 앞으로도 이어나갈 예정입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북토크 등 자세한 소식은 기자 인스타그램(@syoung_art)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다음주 월요일(18일) 방영되는 <벌거벗은 세계사 카라바조 편>에도 출연하니 많은 관심 바랍니다.

<그때 그 사람들>은 미술·문화재 담당 기자가 미술사의 거장들과 고고학, 역사 등을 심도 있게 조명하는 국내 문화 분야 구독자 1위 연재물입니다. 매주 토요일 새로운 이야기로 찾아옵니다. 네이버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미술 소식과 지금 열리는 전시에 대한 심층 분석을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 구독 중인 8만명 독자와 함께 아름다운 작품과 이야기를 만나보세요. 출간된 책으로 곁에 두실 수도 있습니다.

Read Entire Artic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