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기억은 왜곡된다 [한민오의 국제중재 프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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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분쟁중재 변호사의 '법정 매뉴얼'
재판 전 치밀한 문서 증거 선행돼야
증인신문은 차분한 태도·반대신문은 침묵 유도
중재인의 질문이 유리한 경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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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생성형 AI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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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은 다르게 적힌다." 이 노랫말은 단지 시적인 표현이 아니라, 신경과학적으로도 근거가 있는 말이다. 사람의 기억은 책장에서 책을 꺼내는 것과 다르다. 기억이라는 것은 고정 불변의 데이터를 꺼내 쓰는 것이 아니고, 매번 호출할 때마다 그때 그때 상황과 맥락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다. 우리 뇌는 그렇게 작동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법정에서 증인에게 질문을 하면, 그 증인이 특정 사건에 대한 기억을 잘 못하는 경우가 흔히 있다. 서로 다른 두 명의 증인이 같은 사건에 대해서 기억하는 게 다른 경우도 빈번한다. 이는 어찌 보면 이상한 일이 아니다. 기억은 생각보다 믿을 것이 못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5년 전에 있었던 일을 구체적으로 기억할 수 있는가? 불가능하다. 우리는 지난 달에 있었던 일, 아니 어제 있었던 일도 헷갈리곤 한다. 과거 기억을 소환하는 경우에도, 그 기억은 지금 맥락에 맞추어 다소 재구성이 되곤 한다.

국제중재의 꽃은 심리기일이고, 심리기일의 7할은 증인 신문이다. 중재판정부는 증인의 말을 듣고, 사실관계 판단을 한 다음, 이를 토대로 누구 편을 들어줘야 하는지 정하곤 한다. 그런데 증인의 증언이 이렇게 불완전하다면, 이를 바탕으로 제대로 된 사실 판단을 할 수 있을까?

중재판정부가 사실관계 판단을 할 때, 그 정확성을 믿을 수 없다면, 이는 중재의 근간이 흔들릴 일이다. 이러면 아무도 수백억 원짜리 국제 분쟁을 중재판정부의 판단에 맡길 수 없게 된다. 그래서 국제중재에서는 증인의 증언이 가지는 한계를 보완하기 위한 여러 수단이 동원되곤 한다.

문서는 '증거의 왕'

2년 전에 '추락의 해부'라는 영화를 흥미롭게 관람한 적이 있다. 어느 날 스위스 산장에서 한 남자가 죽은 채 발견된다. 자살일까, 아내의 타살일까? 법정에서 검사 측이 사건을 재구성한다. 다 들어보면 정황상 아내의 타살임이 분명해진다.

그런데 아내를 변호하는 변호사의 말을 들어보면 검사의 스토리 중 앞뒤가 안 맞는 부분이 너무 많다. 선후 관계를 따져보니 아내의 살인이라고 보기에는 도무지 설명이 안 되는 부분이 많은 것이다. 영화 말미에 시각 장애를 가진 아들이 증언을 한다. 그 증언을 들어보면, 그의 엄마는 살인자가 아니다. 이것으로 사건 자체는 종결된다. 그렇지만 아들의 증언이 정말 사실인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아들의 말을 검증할만한 문서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영화는 미완의 상태로 끝난다.

국제중재 사건에서는 문서가 증거의 왕이다. 문서는 일이 발생한 당시 상황을 가장 직접적적으로 포착하고 있는 자료이다. 이메일은 물론이고, 사내 메신저 메시지나 카카오톡 메시지도 중요한 서증으로 제출되어 활용되는 경우가 많다.

사진=AI 생성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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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가 중요하다 보니, 증인이 증인진술서를 작성할 때도 단순히 자기 기억에 의존해서 사실관계를 정리하는 경우는 드물다. 오히려 주요 문서들을 펼쳐놓고, 그에 맞추어 사실관계를 정리하는 게 더 일반적이다. 나중에 증인의 말과 상반되는 문서가 나오지 않도록, 증인진술서 작성 단계에서부터 심혈을 기울이게 된다.

이때 증인과 문서 하나하나를 미리 꼼꼼하게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증인신문 때 이런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 가장 당혹스럽기 때문이다. "증인, 1차 진술서 34문단에 여러 서증들을 각주에 언급하였지요? 그 서증들은 다 확인해보고 각주에 언급하였나요? 증인, 그 문서 중 C-25번 서증을 한 번 확인해봅시다. 이 문서는 본 적이 있지요? 본 적이 없다구요? 증인이 진술서를 작성할 때 내용 확인을 안 하였나요? 증인은 남이 대필해준 진술서를 아무 확인도 없이 도장만 찍은 것인가요? 그럼 증인의 진술서를 어디까지 믿을 수 있는 것인가요?"

증인진술서에 증인이 모르는 내용을 적거나, 잘 모르는 문서를 포함시키면 나중에 증인은 전체적인 신뢰도에 치명상을 입을 수가 있다. 증인 한 명을 믿을 수 없게 되면, 그 증인이 속한 회사의 행동을 전체적으로 믿기 어렵게 되고, 사건의 향방이 그로 인하여 기울 수도 있다. 그래서 증인 신문 전에는 치밀한 사전 준비가 필수적이다.

흥분하면 진다

증인이 증언을 할 때 중재판정부는 증인의 태도를 보고 그를 신뢰할 수 있는지를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

몇 년 전 건설중재 심리기일 때 있었던 일이다. 상대방 증인은 아시아에 있는 재벌기업의 회장이었다. 그 회사는 고층 건물 건설 프로젝트의 발주처였다. 건설 자체는 한국 시공사가 수행했다. 그 발주처는 한국 시공사에게 아무 합리적인 근거 없이 공사대금을 수백억 원 미지급하고 있었다.

그 회사의 회장이 워낙 수시로 마음을 바꾸는 성격이라, 한국 시공사는 현장에서 상당히 애를 먹었는데, 이 점을 판정부에 입체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심리기일 후반부에 그 회장에 대한 반대신문이 예정되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증인은 증언을 하다가 화를 냈다가, 조금 지나서 눈물도 흘렸다가, 다시 시간이 지나니 딴청을 피우는 등 감정 기복이 롤러코스터 수준이었다.

압권은 그 증인이 심리기일 마지막 날 아침에 중재판정부를 포함해서 모든 당사자와 대리 로펌들에게 장문의 이메일을 갑자기 보낸 일이다. 자기는 억울한 게 많은데, 자기 변호사들이랑 자기 기술전문가들이 다 자기 말을 안 듣고, 자꾸 우리 쪽 말에 동의를 하니, 중재판정부가 그 증언들을 무시하고 알아서 공명정대한 판단을 내려달라고 호소문을 쓴 것이다.

사진=생성형 AI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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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기일 마지막 날 시작을 할 때 상대방 대리 로펌은 민망해서 뭐라고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자기 의뢰인이 아무런 사전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그 누구도 믿지 말라고 이메일을 보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판정부는 감정 기복이 심한 상대방 증인을 보고, 아마 여러 가지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추측이 된다. 역시나 결과는 한국 시공사의 완승. 상대방은 심리기일 때 감정 조절을 못해서 대형 자살골을 넣은 셈이다.

그 정도가 아니더라도, 심리기일 때 증인이 흥분하는 경우는 종종 있다. 변호사가 반대신문을 할 때 비슷한 질문을 연달아 하는 경우가 있다. 한국 사람은 한 번 했던 질문을 또 물어보면 처음에는 답답해하다가, 나중에는 화를 내는 경우가 있다. 이건 금물이다.

증인의 증언은 예전에 방영된 예능 프로그램에서 진행한 '당연하지' 게임과 비슷한 데가 있다. 상대방이 뭐라고 하든, 평정심을 잃지 않고 내가 기억하는 바를 설명하고, 내가 확인해줄 수 있는 것을 확인시켜 주면 된다. 증인은 상대방 변호사와 토론 대회를 하는 것이 아니고, 중재판정부에게 사실 관계를 설명하는 역할이어서, 차분하고 진솔한 태도를 유지하면 된다. 괜히 점수를 더 따려고 할 필요는 없다, 이는 과유불급이다. 그저 점수가 깎이지만 않으면 된다.

그래서 답변을 화려하게 하는 것보다, 담백하게 하는 스타일이 훨씬 낫다. 상대방 변호사가 반대신문을 하면서 한 번 했던 질문을 토씨만 바꿔서 또 반복하면, '아 원하는 답이 안 나왔나 보다' 하고 담담하게 넘어가면 된다.

침묵이 금이 아닐 때도 있다

'침묵이 금이다'라는 격언이 있다. 그런데 중재 심리기일에서 침묵은 치명적일 수 있다. 중재인들은 순간적으로 판단을 내리고, 각자 내린 판단을 중간 휴식 시간에 서로 확인하는 경우가 많다. 증인이 결정적인 순간에 답변을 못하고 어색하게 침묵하면, 이미 중재인은 '답을 못하는구나'라고 생각을 하기 일쑤다.

한번은 상대방 기술전문가를 반대신문한 적이 있다. 금속 용접 전문가였다. 우리 의뢰인이 선임한 기술 전문가의 의견에 대해 이런 저런 꼬투리를 잡길래, 한참 반대신문을 하다가 "그럼 전문가님께서는 어떤 방식으로 용접이 제대로 되었는지 검증을 하시겠어요? 문제 제기는 많이 하셨는데, 아무런 대안은 제시를 안 하셔서요. 어떻게 하시겠어요?"

30초간 침묵이 이어졌다. 일부러 후속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 어색한 침묵의 시간을 즐겼다. 오히려 중재인들이 다음 질문을 안 하냐고 불안해하는 기색을 비쳤다. 그래도 일부러 그 고요한 분위기를 깨지 않았다. 마지 못해 상대방 기술전문가가 "글쎄요.." 식으로 답변을 했다. "그러니까 용접의 적절성을 검증하는 방법은 하나도 제안한 게 없는 거죠? 알겠습니다. 넘어가겠습니다." 결과는 우리 의뢰인의 전부 승소. 백마디 말로 증언의 허점을 찾아내는 것보다, 일순간의 침묵으로 분위기를 우리 편으로 가져온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중재인을 우리의 식탁으로 초대하다

사람은 간혹 청개구리 심보가 있어서, 상대방이 강하게 주장을 하면 괜히 반대하고 싶어질 때가 있다. 국제중재 심리기일에서도 이 점을 조심해야 된다. 너무 강하게 주장을 하다 보면, 도리어 반발심을 사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우리 의뢰인에게 불리한 증거들도 중립적인양 다루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사정을 고려하면 우리 말이 타당하다고 설득하는 기술이 필요하다. 증인 반대신문을 할 때도 그렇다. 중재인들은 이미 우리 쪽의 질문들을 삐딱하게 바라볼 때가 많다. 어차피 상대방 증인을 공격하려고 작정하고 질문을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질문 자체가 제3자가 보기에도 과하거나 부당하면, 중재인은 눈살을 찌푸리기도 한다.

사진=AI 생성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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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에 두바이에서 진행되었던 심리기일에서의 일화이다. 영국인 중재인 세 명이 필자가 반대신문을 하는 데 자기들도 질문이 있다며 중간에 계속 끼어들곤 했다. 하도 그러길래 나중에는 아예 테마 하나를 마무리할 때마다 중재인들에게 '관련 질문 있으시면 하시지요'라고 권유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중재인들이 적극적으로 이런 저런 질문들을 하곤 했다. 대개의 경우 국제중재 변호사들은 중재인이 반대신문 중간에 질문을 하는 것을 꺼려한다. 자기가 준비한 반대신문 리듬이 깨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했던가. 중재인들을 나의 식탁으로 초대해서 아예 열심히 질문을 하시라고 판을 깔아줬더니 내가 하려던 질문을 중재인들이 하고 있어서 오히려 고마웠다.

그런 경우 증인이 답변을 하면, 중재인은 그 답변을 의심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곤 한다. 변호사가 아니라 자기가 한 질문에 대한 답을 들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 사건은 사실 판단이 우리 의뢰인에게 유리하게 나왔고, 그에 터 잡아 전체 결론도 만족스럽게 나왔다. 억지로 떠먹이려고 하면 더 먹기가 싫어지는데, 세팅을 다 해놓고 고기를 구우시라고 하니, 판정부는 마치 자기가 요리를 다했다고 느끼고 내가 차린 밥상에서 식사를 맛있게 하고 간 격이다.


이처럼 국제중재에서는 끊임없이 심리전이 진행된다. 치열한 스포츠 경기를 하듯, 심리기일을 한 번 치르고 나면 에너지 소모도 대단하다. 그래도 심리기일이 끝나면, 상대방 변호사와 잘 싸웠다고 서로 악수를 하는 게 보통이다. 경기에서 이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정당당하게 멋지게 싸워서 이기는 것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다음 시합에서 또 다시 멋지게 합을 겨루는 것이 국제중재의 매력이다.

김유진 기자 magiclam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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