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권 대규모 화재로 잿더미가 된 경상북도 안동시가 진보-보수 지지자들의 이념 전쟁터가 됐다. 굳어진 지역감정 문제와 정치 양극화에 따른 현상으로, 화마가 휩쓸고 간 이재민들의 상처에 또 한 번 불똥을 튀기는 모양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 2심 선고가 열린 지난 26일 서울고등법원 앞에서 한 보수단체의 집회 중 발언이 기자의 귀를 의심케 했다. 이날 오전 11시께 법원 출입구 인근에서 집회를 연 이 단체는 "지금 불이 난 안동이 이재명 고향이라고 한다. 왜 불이 났는지 아느냐"면서 원색적인 폭언을 이어갔다.
강성 보수층이 이용하는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도 "안동은 이재명 때문에 벌 받는다", "안동 지역 희생해 이재명 살리는 것", "그러게 왜 안동 선생님들은 이재명을 정치판에 올려놓으셔서" 등 충격적인 말들이 등장했다.
진보 지지자들도 안동을 비난하고 있다. 이들은 안동 이재민 대피소를 찾은 이 대표에게 한 이재민이 "왜 이제 왔냐. 불 꺼야지. 우리 지금 타고 있는데, 너무하는 거 아니냐"고 볼멘소리를 한 장면이 보도되자, 안동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막말을 내뱉고 있다. 안동이 보수 지지세가 강한 지역이라는 점에서다.
해당 이재민의 발언을 보도한 한 언론사 유튜브 영상에는 "2찍(윤석열 대통령 지지자 멸칭) 해놓고 왜 이재명한테?", "저쪽은 민주당 안 뽑지 않나", "제대로 대통령 뽑고 큰소리쳐라" 등의 댓글이 달렸다. 진보 성향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도 이 이재민을 향해 "2찍 지역이니 뭐", "욕먹어도 싸다", "진짜 화난다" 등 반응이 나왔다.
특히 친민주당 성향 맛 칼럼니스트 황교익씨는 지난 27일 페이스북에 해당 이재민의 발언 장면을 캡처해 올리면서 "정치인은 타인의 억울까지 안고 살아야 한다"고 썼다. 이 게시물에는 "당신들이 찍어준 윤석열 검찰 횡포에 죽다 살아나느라 그랬다", "저런 머리를 가졌으니 윤석열이나 찍지", "무식해야 2찍이 되는 것" 등 이재민을 공격하는 댓글이 다수 달렸다.
안동을 향해 달린 진보-보수 지지자들의 이런 폭언은 지역감정 고착화와 점차 악화하는 정치 양극화에 따른 '참상'이 고스란히 드러난 대목이다. 지난해 12월 29일 전 국민에게 충격을 준 무안 제주항공 사고 때도 사고 발생 지역이 전라도라는 점에 주목한 보수 지지자들이 "또 특검하자 하겠네" 등 정파적인 반응을 보여, 유족들이 눈물을 흘렸다.
우리 국민들은 이런 양극화에 극심한 피로감을 호소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17~18일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서치뷰가 유권자 2000명에게 정치 양극화 심각도를 물은 결과 '우리나라 정치적 양극화가 심각하다'는 의견에 94.5%(매우 동의 73.5%·동의 21.1%)가 동의했다. 정치적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책임이 가장 큰 주체'로는 절반에 가까운 47.0%가 '정치권'을 지목, 그다음으로는 언론(27.1%), 정부(12.0%), 유튜브(11.8%) 등 순이었다.
또 최근 통계청이 발표한 '2024 한국의 사회지표'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 국민 10명 중 8명은 '보수와 진보' 간 갈등을 가장 큰 사회 갈등으로 느낀 것으로 나타났다. 이 통계에 따르면 우리 사회에서 보수와 진보 간 사회 갈등을 심각하게 느낀다는 응답은 77.5%로, 조사 대상 8개 항목(빈곤층-중상층, 근로자-고용주, 개발-환경보존 등) 중 가장 높았다.
여야 모두 이런 상황에 촉각을 기울이고 있지만, 정쟁은 악화 일로를 걷고 있다. 당장 이번 영남권 화재만 하더라도 여야는 재난 대응에 사용할 예비비 삭감 문제를 놓고 '네 탓 공방'을 벌인다. 권영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국가적 재난 앞에 정쟁을 멈춰야 한다"고 했고, 이 대표는 "사람이 죽어 나가는 와중에도 정쟁을 벌이는 것이 안타깝다"고 했다. 정쟁을 벌이는 주체들의 모순에 국민은 또 한 번 반으로 갈라지고 있다.
홍민성 한경닷컴 기자 msho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