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 열풍에 일단 의사는 됐지만… 뒤늦게 ‘본래의 나’가 꿈틀댄다면[강용수의 철학이 필요할 때]

17 hours ago 4

외환위기 이후 안정-고소득 선망, 개성의 시대에도 의대 쏠림 심해
시행착오 끝 진정 원하는 것 깨달아… 의사 되고 작가 등 재능 펼치기도
타인 기준 내려놓고 삶 들여다보고 나만의 일, 개성 찾을 때 행복해져

선망받는 의사가 된 뒤에도 새로운 길을 개척한 이들이 있다.  대학병원 의사들의 진료 현장과 우정을 그린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수술실 장면. 사진 출처 tvN

선망받는 의사가 된 뒤에도 새로운 길을 개척한 이들이 있다. 대학병원 의사들의 진료 현장과 우정을 그린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수술실 장면. 사진 출처 tvN

강용수 고려대 철학연구소 연구원

강용수 고려대 철학연구소 연구원
《 니체의 “너 자신이 되어라”

현재 한국 사회에서 의사는 여러 이유로 선망받는 직업이다. 의대에 진학하면 태어날 때 주어진 삶의 출발선을 탓할 필요 없이 신분 상승을 할 수 있다는 인식도 깔려 있다. 그러나 의대에 항상 최상위권 학생들이 몰렸던 것은 아니다. 필자가 대학을 다니던 1980년대에는 물리학과, 전자공학과, 컴퓨터공학과 등의 인기가 좋았다. 》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처럼 머리만 좋으면 판검사나 의사가 될 수 있다고 믿던 시절에도 전국의 이과 1등들은 기초과학이나 이공계 학과로 모여들었다. 오늘날 의대 쏠림 현상은 한국의 사회·경제적 상황과 맞물려 나타난 결과다. 1997년 외환위기 등 몇 차례의 경제 위기를 겪으면서 안정적으로 높은 소득을 올리는 직업을 최고로 여기게 된 것이다. 지금처럼 진로의 획일화가 덜하던 시대였지만 필자는 1980년대에 의대를 다닌 의사들과 대화를 나누며 특별히 인상적인 점이 있었다. 적지 않은 이들이 자신의 영역 외 다양한 분야에 대한 관심과 지적 욕구가 컸다. A 의사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가족을 책임져야 했기에 전문의의 길을 택했지만 자신의 전공과 관련된 칼럼과 책을 꾸준히 쓰고 있다. B 의사는 청소년기에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감명 깊게 읽었고, 전문의가 된 뒤 유튜브로 철학 강의를 접하며 다시 인문학에 눈을 떴다. 은퇴하면 관련 책을 쓰는 작가가 되고 싶다고 한다.

 골든아워’를 쓴 이비인후과 의사이자 작가 이낙준 씨. 사진 출처 동아일보DB

웹소설과 드라마 ‘중증외상센터: 골든아워’를 쓴 이비인후과 의사이자 작가 이낙준 씨. 사진 출처 동아일보DB
수학에 남다른 재능이 있는 C 의사는 매년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이 치러질 때마다 수학 영역 문제를 풀어본다. 절반 이상은 암산으로 풀고, 나머지는 펜을 들어 계산하는데도 매번 만점을 받는다고 한다. 주변 지인들은 그의 재능을 보며 아쉬워한다. 의학이 아니라 수학을 전공했다면 세계적인 결과물을 낳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서다. 이 밖에도 의대 교수로 재직하며 유튜브 활동을 병행하는가 하면, 이른 나이에 의사라는 업(業)을 내려놓는 이도 있다. 부모의 권유로 의대에 진학했지만 ‘피’를 무서워해 개원을 망설였고, 그 과정에서 가족과 갈등을 빚었지만 자신의 삶을 뒤늦게라도 개척하려는 것이다.

6·25전쟁 이후 한국이 가난을 벗어나는 데는 교육과 근면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잠을 줄여가며 공부해 좋은 대학에 진학해야 출세할 수 있다고 믿던 시절이었다. 반대로 공부를 못하면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노래와 춤에 끼를 보이는 학생에게는 ‘날라리’라는 낙인을 찍고, 가수를 ‘딴따라’라고 낮춰 부르기도 했다. 지금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서 탁월하면 그것으로 생계를 꾸릴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요리에 재능이 있으면 셰프를 꿈꿔 볼 수 있고 뷰티, 게임, 여행, 먹방(먹는 방송) 등 특정 주제를 다루는 전문 창작자가 부상하는 등 개성과 다양성이 예전보다 인정된다. 직업에 귀천도 많이 사라져 대학에 꼭 가지 않아도 되는 시대다.

니체의 유명한 명언 가운데 “너 자신이 되어라(Werde, der du bist)”는 의대뿐만 아니라 모든 전공과 직업을 선택할 때 적용되는 지혜다. 니체 자신도 처음에는 ‘본래의 자신이 되는 법’을 잘 알지 못한다고 말한다. 오랜 시행착오를 거치고 나서야 자신이 진정으로 원했던 것을 깨닫게 되므로 여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본래의 자기 모습이 돼 가는 과정에서 삶의 목적을 미리 짐작하는 것은 위험하다. 미성숙한 상태에서 감당하지 못할 큰 과제를 떠안기보다는 어느 정도 때를 기다려야 한다. 내면의 꿈과 이상이 자라나 마침내 우리 자신에게 명령할 때, 비로소 ‘전체를 위해 개별적인 것을 조직하고 지배하는 유능함’이 생겨난다.

내과 의사직을 버리고 전업한 장봉수 웹툰 작가가 그린 ‘내과 박원장’. 네이버웹툰

내과 의사직을 버리고 전업한 장봉수 웹툰 작가가 그린 ‘내과 박원장’. 네이버웹툰
니체는 아직 학부생에 불과했을 때 교수가 된 과정을 회고하며 자신의 내면에서 무엇이 자라고 있는지 예감조차 못 했다고 했다. 처음에는 무엇을 원하고 추구하는지, 그 목적과 소망을 알지 못해 의도적으로 노력한 것도 없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자신의 능력이 성숙하면서 마침내 운명과 마주하게 됐다. 여기서 ‘자신의 운명’이란 내가 ‘다른 그 무엇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되고 싶다’는 확신이 들 때, 앞으로 되고자 하는 본래의 자신을 하나의 운명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니체가 말한 ‘본래의 나 자신이 되는 법’은 어렵지 않다. 세월이 흐르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다만 무엇을 하기에 늦은 때는 없다는 것을 새기고 남의 기준이 아닌 자신의 기준으로 삶을 들여다봐야 한다. 그럴 때 진정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분명해진다. 그것은 글쓰기일 수도 있고 요리, 수학 공부, 여행일 수도 있다. 모두 각자가 결정할 일이다. 니체는 ‘자신만의 위대한 과제를 찾으라’고 충고한다.

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존재로 살아가는 길은 자신의 욕망에 따라 주체적으로 선택하는 것이다. 남들이 대신할 수 없는 나만의 일을 찾는 것, 즉 개성 있게 살아가는 것은 행복한 삶에서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래서인지 의사라는 직업에 충실하면서도 독서와 글쓰기, 유튜브 활동 등을 통해 숨겨진 재능을 발휘하고 있는 이들이 행복해 보였다.

강용수 고려대 철학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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