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오타니’ 최향남…“MLB 도전했던 마음으로 다시 마운드 도전”[이헌재의 인생홈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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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오스트리아 비너노이슈타트에서 뛰었던 최향남이 현지 팬을 들어올리며 활짝 웃고 있다. 최향남 제공

2015년 오스트리아 비너노이슈타트에서 뛰었던 최향남이 현지 팬을 들어올리며 활짝 웃고 있다. 최향남 제공

‘풍운아’라는 별명이 최향남(54)만큼 잘 어울리는 야구 선수가 있을까. 1990년 해태 타이거즈(현 KIA)에 입단해 LG, 롯데 등을 거친 뒤 2013년까지 KIA 유니폼을 입었던 그는 통산 54승 79패 24세이브 14홀드 평균자책점 4.05를 기록했다. 승리보다 패배가 많은 선수였고, 평균자책점도 4점대로 평범한 편이다. 하지만 그는 한국 야구 선수 중 누구보다 많은 나라와 다양한 리그에서 뛰며 파란만장한 야구 인생을 살았다.

최향남은 선수 시절부터 달리기와 등산으로 체력을 다졌다. 최향남 제공

최향남은 선수 시절부터 달리기와 등산으로 체력을 다졌다. 최향남 제공

최향남은 하고 싶은 게 많은 선수였다. 보통 선수들과 달랐던 점은 하고 싶은 일이 있을 때 거침없이 도전했다는 것이다.

1998년 LG 소속으로 12승을 거두며 일약 에이스로 떠오르기도 한 그는 이후 어깨 수술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2003년은 한 경기도 등판하지 못했지만 2004년 친정인 KIA로 돌아와 쏠쏠한 활약을 펼쳤다. 그러던 그는 2005년 시즌을 마친 후 갑자기 세계 최고의 무대라는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에 도전장을 던졌다. 당시 35세이던 그는 테스트를 통해 클리블랜드 산하 트리플A 버팔로에 입단했다.

혈혈단신 혼자 미국 땅을 밟았지만 활약은 모든 이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34경기에 출전해 8승 5패 평균자책점 2.36이라는 빼어난 성적을 올렸다. 제대로 된 계약이었다면 MLB 승격을 노려볼 만도 했다. 하지만 마이너리그 계약이었던 터라 결국 기회는 팀 내 다른 유망주에게 돌아갔다.

2006년 첫 메이저리그 도전 당시 클리블랜드 산하 트리픎 버팔로 유니폼은 입은 최향남이 태극기를 들어보이고 있다. 동아일보 DB

2006년 첫 메이저리그 도전 당시 클리블랜드 산하 트리픎 버팔로 유니폼은 입은 최향남이 태극기를 들어보이고 있다. 동아일보 DB

2007년 KBO리그 롯데로 돌아온 그는 또 한 번의 전성기를 맞는다. 2008년 주전 마무리 임경완이 난조에 빠지자 덜컥 마무리 투수를 맡았는데 이게 대성공을 거둔 것이다. 구위는 20대 후반~30대 초반에 비해 다소 떨어졌지만 자신감 있는 투구와 경기 운영 능력을 앞세워 롯데의 뒷문을 든든히 지켰다. 얼마나 공을 빠른 템포로 던졌는지 적장의 목을 술이 식기 전에 베어 온 관우에 빗대어 ‘향운장’이라는 멋진 별명도 얻었다. 그해 그는 2승 4패 9세이브 3홀드 평균자책점 3.58을 기록했다.

이때 그의 나이는 이미 37세였다. 보통 선수였다면 계속 KBO리그에서 뛰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최향남이었다. 포스팅시스템(비공개 경쟁입찰)을 통해 다시 한번 MLB 문을 두드렸다. 최향남은 “2006년 미국 선수들을 상대해 보면서 충분히 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더 늦기 전에 도전해야겠다는 생각이 강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또 한 번의 반전이 일어났다. 세인트루이스가 덜컥 포스팅에 응한 것이다. 포스팅 비용은 단돈 101달러. 한국 돈으로 약 14만 원밖에 되지 않는 상징적인 액수였지만 한국 선수 최초의 포스팅 성공 사례였다. 이후 류현진, 강정호, 이정후, 김혜성 등이 줄줄이 포스팅 시스템을 통해 메이저리그에 진출했다. 메이저리그 마운드는 끝내 밟지 못했다. 세인트루이스에서 방출된 후 다시 테스트를 거쳐 입단한 LA 다저스 산하 트리플A 앨버커키에서 9승 2패 평균자책점 2.34로 맹활약했으나 적지 않은 나이가 걸림돌이 됐다.

최향남이 MLB에 도전하면서 입은 유니폼은 이뿐이 아니다. 2008~2009시즌에는 도미니칸리그 아길라스에도 소속됐고, 2009~2010시즌에는 멕시칸리그 알고도네로스에서도 뛰었다.

2010년 LA 다저스 스프링캠프에 참가한 최향남. 최향남 제공

2010년 LA 다저스 스프링캠프에 참가한 최향남. 최향남 제공

선수 생활 마지막 유니폼은 2015년 유럽에 있는 오스트리아에서 했다. 비너노이슈타트 유니폼을 입었던 최향남은 “야구 선수로 미국, 일본, 도미니카공화국, 멕시코에서 뛰었다. 그런데 유럽은 한 번도 안 가봤더라. 여행 겸 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고 했다.

세미 프로리그인 오스트리아에서 그는 MLB의 투타겸업 슈퍼스타 오타니 쇼헤이 같은 선수였다. 투수인 그는 예전엔 타석에 들어설 일이 없었지만 오스트리아에서는 투타를 겸했다. 그는 투수로는 에이스였고, 타자로는 안타기계였다.

그러던 어느 날 안타를 치고 베이스를 밟다가 후방 십자인대를 다쳤다. 하지만 그는 한 달 간 재활을 하고 남은 리그를 뛰었다. 시즌이 끝난 후 그는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최우수선수(MVP)에도 뽑혔다. 최향남은 “아름다운 기억이었다. 원정 경기를 갈 때는 승용차에 4명씩 앉아 알프스를 넘어 다녔다”며 “함께했던 동료들은 실력을 떠나 야구를 잘하고 싶다는 몸짓과 눈빛이 너무 좋았다. 나도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최향남은 2008년 롯데에서 마무리 투수로 성공 시대를 열며 ‘향운장’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동아일보 DB

최향남은 2008년 롯데에서 마무리 투수로 성공 시대를 열며 ‘향운장’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동아일보 DB

오스트리아 선수들은 대개 따로 직업이 선수들이었다. 현지 선수들과 친해진 그는 쉬는 날에는 이 집, 저 집으로 초대를 받곤 했다. 평소 술을 마시지 않는 최향남이지만 그곳에서는 종종 포도주를 즐겼다. 그는 “내 평생 언제 그런 경험을 다시 해볼까 싶다. 순수했던 동료 선수들과 포도주와 빵, 수세 소시지를 먹으며 좋은 추억을 쌓았다. 내 인생 최고의 여행이 아니었을까 싶다”고 말했다.

그가 44살까지 마운드에 설 수 있었던 건 철저한 자기관리 덕분이었다. 원래부터 그는 술, 담배를 하지 않았다. 먹는 것에도 조심스러웠다. 가공육이 몸에 좋지 않다는 이유로 김밥을 먹을 때도 햄은 빼고 먹을 정도였다. 최대한 가공식품과 인스턴트 식품을 멀리하고 가능한 대로 집밥을 먹었다.

운동도 열심히 했다. 야구 외의 취미 활동이 없었기에 운동 후엔 충분한 휴식을 취했다. 겨울에는 한 달씩 화악산에 들어가 산을 달리며 몸을 만들기도 했다.

2010년 겨울 화악산에서 개인 훈련을 하고 있는 최향남. 동아일보 DB

2010년 겨울 화악산에서 개인 훈련을 하고 있는 최향남. 동아일보 DB

오스트리아에서의 마지막 선수 생활 후 그는 지도자가 돼 후배들을 가르치고 있다. 글로벌선진학교 감독을 맡았고, 중국 상하이 골든이글스 투수코치로 2년을 지냈다. 2023년에는 상무 야구단 투수코치를 맡았다. 현재는 휴식을 취하며 지도자 생활을 모색하고 있다.

선수로서 누구도 하지 못했던 다양한 경험을 한 그는 선수들을 이해하려 애쓰는 지도자가 되려 애쓴다.

그리 길지 않은 지도자 경력에도 불구하고 그를 ‘아버지’라고 부르는 선수들도 몇 명 있다. 최향남은 “많은 지도자들이 잘하는 선수를 더 잘 가르치려 한다. 하지만 내 경우엔 잠재력이 있지만 제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선수들에게 더 마음이 많이 간다”라며 “내가 겪은 시행착오를 통해 그런 선수들은 훌륭한 선수로 양성하는 게 목표다. 그런 선수들이 ‘아버지’라고 불러줄 때 보람을 느낀다”라고 말했다.

선수 시절 취미로 골프를 시작한 최향남은 싱글을 치는 아마추어 고수다. 최향남 제공

선수 시절 취미로 골프를 시작한 최향남은 싱글을 치는 아마추어 고수다. 최향남 제공

어느덧 50대 중반이 된 그에겐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예전 MLB에 도전하는 마음으로 다시 한번 실전 마운드에 서 보는 것이다. 최향남은 “후회 없는 선수 생활을 했다고 자부한다. 10년 전만 해도 ‘이제는 징하다’는 생각이었다”며 “하지만 50대가 되고 보니 마운드에 서는 게 내 삶에 적지 않은 의미가 있을 것 같다”며 웃었다.

몇 해 전 사구체신염을 앓은 그는 요즘 서서히 몸을 만들어가고 있다. 가장 기본적인 러닝과 맨몸운동이 시작이다. 그는 “중년 나이대에 가장 좋은 게 맨몸운동이다. 부상 위험 없이 몸의 기초를 다질 수 있다. 기본적인 몸을 만든 근육 운동을 하는 게 가장 효과적”이라고 했다. 그는 “사실 마운드에 설 수 있을지 없을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혼신을 다한 마지막 공을 던진다는 게 내겐 엄청난 축복 같은 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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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재 기자 un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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