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상원에서 지난달 10일(현지 시간) 세습 귀족 92명의 의결권을 완전히 폐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가문 혈통에 따라 의원직을 상속해 온 제도가 수백 년 만에 마침표를 찍게 됩니다. 영국 일간 가디언 등은 5월로 예상되는 현 의회 회기 종료 이전에 공식적으로 제도가 사라질 것으로 전망했습니다.
영국의 의회 제도는 근대 의회 민주주의 제도의 시초로 불립니다. 귀족제 전통이 강한 영국이긴 하지만, 아직도 선출직이 아닌 ‘세습’ 귀족이 ‘입법 기관’에서 일한다는 사실에 놀란 분들도 계실 겁니다. 현대 민주주의 국가의 의회에서 손에 꼽히는 독특한 기관, 영국 상원을 살펴보겠습니다.
‘저 나라 사람들은 왜 그렇지?’ ‘우리와는 어떻게 다르지’ 국내외 뉴스 속 궁금증을 콕 짚어 새로운 시각에 적응시켜 드립니다.
영국 상원은 그 규모부터 특이합니다. 이번 법안 통과 이전 기준으로 총 842명의 상원 의원이 임기 없이 종신 재직하고 있었습니다. 의석 수 제한도 없어,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입법 기관으로 알려져 있죠.상원과 하원의 차이는 각 의회의 회의실 모습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14세기부터 이어진 ‘귀족원’ 전통
상원의 역사는 14세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영국에선 14세기 에드워드 3세 이후 의회를 상원인 ‘귀족원(House of Lords)’과 하원 ‘평민원(House of Commons)’으로 구분한 양원제를 운영해 왔습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상원은 귀족과 성직자, 법률가 등으로 구성됐습니다. 하원은 지역을 대표하는 평민 의원들로 구성돼 귀족을 견제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17세기 청교도 혁명으로 공화정이 수립된 시기를 제외한 수백 년간 상원은 예산 결정과 법률 제정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그러나 1911년과 1949년 의회법 개정으로 실질적 권한 대부분을 하원에 넘겨줬습니다. 현재는 하원에서 통과된 법안을 심층적으로 검토하고 수정안을 제출하는 역할이 핵심입니다. 최종 입법권은 선출직인 하원에 있어 상원에서 법안을 거부할 수는 없습니다.
현재 하원 의원이 전국 650개 선거구에서 1명씩 선출되는 것과 달리, 임명직인 상원 의원이 되는 방식은 크게 3가지로 구분됩니다. 총리의 추천으로 국왕이 임명하는 ‘생애 귀족(life peer)’과 부모로부터 작위를 물려받은 ‘세습 귀족(hereditary peer)’이 있고, 나머지는 성공회 주교 20여 명으로 구성된 성직자 의원입니다.
그러나 국민이 선출하지 않은 기관이 지나친 권력을 행사한다는 비판, ‘세습’ 전통이 여론에 맞지 않는다는 비판은 계속 존재했습니다. 녹색당 소속 상원의원 제니 존스는 “우리는 명목상 현대 민주주의 국가이면서 실제로는 반봉건적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다”고 꼬집기도 했습니다.
결국 1999년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 전 총리 당시 상원 개혁안으로 세습 제도가 폐지되면서 당시 759명이던 세습 의원은 92명만 남기고 모두 퇴출됐습니다. 이달 통과된 법안은 마지막 숙제를 마무리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다만 이번 법안 통과가 세습 귀족의 완전한 퇴출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점은 짚어둘 필요가 있습니다. 상원 보수당 원내대표는 세습 귀족 퇴출을 강행하면 노동당의 나머지 입법 전체를 막겠다고 공개 위협했고, 결국 보수당 세습 귀족 15명이 ‘생애 귀족’으로 전환돼 상원에 잔류하는 절충안을 받아냈습니다.상원에서 영국 국왕 관련 국가 행사를 주관하는 직위 ‘얼 마셜(Earl Marshal)’과 ‘그레이트 체임벌린 경(Lord Great Chamberlain)’을 세습으로 보유한 두 귀족도 의결권은 잃었지만, 여전히 의회 출입이 허용되고 국가 행사에 참석할 수 있습니다.
●거듭된 ‘낙하산 인사’… 왕실보다 까다로운 귀족 작위 박탈
세습 귀족 폐지 이후에도 개혁 과제는 산적해 있습니다. 사실 1999년 개혁 이후 세습 귀족은 90명 이하로 줄고, 700명이 넘는 생애 귀족이 상원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죠. 상원 개혁을 요구하는 이들은 입법부의 직책이 가문에 상속되는 것만큼이나, 검증되지 않은 인물이 지명되는 생애 귀족 선정 절차에도 문제가 크다고 지적합니다.
왜 이렇게 생애 귀족의 숫자가 많아졌을까요? 세습 귀족을 제외하면 상원의원이 되는 방법은 사실상 한 가지로 좁혀집니다. 총리의 추천입니다. 2000년에 독립된 ‘상원 임명 위원회’가 설립됐지만 최종 추천권은 총리에게 있고, 후보자 검증에 요구되는 기준도 없습니다.
이렇다 보니 총리가 전직 보좌관이나 장관 등에게 보상처럼 공직을 안겨주는 수단으로 상원의원 임명이 남용됐다는 비판이 오랫동안 제기됐습니다. 거칠게 말해서, 일의 책임은 크지 않은데 내세우기는 좋은 명예로운 직함이다 보니 매 정권에서 ‘은혜 갚기’ 수단으로 활용해왔단 겁니다. 상원 의원은 하원 의원과 달리 봉급을 받지 않는 명예직이어서, 회의 출석 수당은 있지만 본업과도 병행이 가능합니다.
특히 제대로 임명·검증 절차를 거치지 않은 상원의원들이 범죄나 스캔들에 연루되면서 이들을 징계할 수단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습니다. 1992년 상원의원에 임명된 소설가 출신 정치인 제프리 아처는 2001년 위증죄로 징역 4년형을 선고받았지만, 당시엔 수감된 의원을 제명할 법적 근거 자체가 없었습니다.
이후 1년 이상 실형 시 의원직 자동 박탈 규정은 2014년, 품위 위반으로 제명할 수 있는 근거는 2015년에야 만들어졌습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징계로 퇴출된 사례는 단 한 건도 없습니다. 성폭행을 저지른 의원과 코카인 흡입 장면이 촬영된 의원이 각각 자진 사퇴로 사태를 마무리한 것이 전부입니다.
반면 같은 엡스타인 스캔들에 연루된 앤드루 왕자는 지난해 10월 ‘왕자(Prince)’ 칭호와 모든 훈작이 박탈됐습니다. 왕실의 칭호는 왕실 명령으로 즉각 박탈할 수 있지만, 상원의원의 귀족 작위는 입법 절차 없이는 손댈 수 없는 것입니다. 블룸버그통신은 이 대조적인 장면이 상원 제도의 구조적 맹점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고 지적했습니다.

●수십 년째 공전하는 개혁 논의
상원 제도의 순기능을 인정하는 측에서도 현행 구조의 지속은 어렵다고 봅니다. 이에 단기적인 운영 개선안도 논의 중입니다. 노동당은 의원이 80세가 되면 의무적으로 은퇴하는 정년제를 당 매니페스토에 포함시켰으며, 현재 위원회에서 세부 사항을 다듬고 있습니다. 회의에 거의 참석하지 않으면서 직위만 유지하는 의원들을 걸러내기 위한 최소 출석·활동 기준 도입도 함께 검토되고 있습니다.
장기적으로는 상원 자체를 선출제 기관으로 전환하자는 구상도 있습니다. 노동당은 임명제 상원을 폐지하고 비례대표제 등을 통해 지역을 대표하는 ‘국가 및 지역 협의회’로 교체하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습니다. ‘귀족원(House of Lords)’이라는 계급 중심의 명칭 대신 ‘원로원(Senate)’ 같은 현대적 이름으로 바꾸자는 제안도 함께 거론됩니다. 임명 검증 단계의 개혁 사례로는 캐나다가 있습니다. 캐나다는 2016년 상원의원 후보 추천 과정을 초당파 독립자문위원회에 맡기는 방식으로 제도를 바꿔 높은 국민적 지지를 받았습니다.
다만 이런 개혁 논의가 수십 년째 공전하고 있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런던대학교 메그 러셀 정치학 교수는 AP통신에 “상원 개혁은 빙하(glacial) 속도로 진행된다. 수십 년간 논의해도 실현되지 않는다”고 꼬집었습니다. 이번 법안 통과가 진짜 상원 변화의 불씨가 될 수 있을지 지켜봐야 하겠습니다.
김윤진 기자 ky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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