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자를 믿는 제도, 혁신의 속도를 높인다[기고/박종래]

1 day ago 6

박종래 울산과학기술원(UNIST) 총장

박종래 울산과학기술원(UNIST) 총장
글로벌 과학기술 패권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다. 오늘날 경쟁의 승패는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얼마나 먼저 확보하느냐, 그리고 이를 얼마나 신속하게 실현하느냐에 달려 있다. 연구 성과가 실험실을 넘어 산업 현장으로 연결되는, 이른바 ‘랩 투 팩토리(Lab to Factory)’의 속도 역시 국가 경쟁력을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다. 그만큼 연구 현장의 실행을 과도하게 지체시키지 않는 제도적 기반도 중요해졌다. 연구자들이 연구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 조성을 지속적으로 요구해 온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최근 정부가 입법 예고한 ‘국가연구개발혁신법 시행령’ 일부 개정안은 이러한 현장의 요구에 대한 의미 있는 응답이다. 무엇보다 연구자의 연구 몰입을 저해해 온 제도적 장벽을 과감히 개선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개정안의 핵심은 세 가지다. 연구혁신비 신설, 간접비 집행 방식의 네거티브 규제 전환, 그리고 불필요한 행정 규제의 폐지다. 얼핏 보면 단순한 규정 정비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다. 연구지원 행정의 철학이 ‘통제’에서 ‘신뢰’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정책적 전환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연구비 관리는 투명성과 책임성을 확보한다는 명분 아래 사전 통제와 증빙 중심으로 운영돼 왔다. 물론 연구비의 건전한 집행은 중요하다. 그러나 연구개발(R&D)은 본질적으로 불확실성을 전제로 한다. 예상하지 못한 변수와 새로운 발견은 연구 방향을 바꾸고, 그에 따른 자원의 재배분도 불가피하다. 그 과정에서 필요한 판단은 현장과 가장 가까운 연구자가 가장 정확하게 내릴 수 있다. 그럼에도 지나치게 세분된 기준과 절차는 연구자의 자율적 판단을 제한하고 연구 수행의 속도를 늦추는 요인으로 작용해 왔다. 현장의 요구는 분명했다. 필요한 관리는 유지하되 불필요한 절차는 줄여 달라는 것이었다. 이번 개정안은 이러한 목소리를 제도에 반영한 결과다.

연구자들이 체감할 구체적인 변화도 명확하다. 특히 직접비의 10% 범위에서 연구혁신비를 자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됐다. 연구재료비와 연구활동비 간의 경직된 구분도 완화돼 연구 과정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수요에 더욱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게 된다. 또한 간접비에 대한 네거티브 관리방식 도입으로 연구지원 인력을 확충하고 연구 인프라를 개선하며 성과를 확산하는 등 기관별 여건과 특성에 맞는 전략적 투자가 가능해질 전망이다.

이번 제도 개편이 갖는 가장 큰 의미는 연구자와 연구기관의 자율적 운영 역량을 폭넓게 인정했다는 점이다. 이는 단순한 행정 간소화를 넘어 연구자가 연구에 몰입할 수 있는 건강한 생태계를 조성하겠다는 정책적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물론 자율성 확대는 책임성을 전제로 한다. 연구기관과 연구자는 확대된 재량을 보다 투명하고 책임 있게 운영해야 한다. 자율은 방임이 아니며, 신뢰 역시 책임 있는 행동 위에서만 지속될 수 있다.

이번 개정안은 규제와 통제 중심의 연구관리 체계에서 벗어나 연구자와 연구기관 중심의 자율·신뢰 기반 생태계로 나아가는 중요한 출발점이다. 신뢰는 혁신의 속도를 높이고, 혁신의 속도는 국가 경쟁력을 결정한다. 과학기술 패권 경쟁의 시대, 연구자를 믿는 제도가 대한민국 과학기술 경쟁력을 획기적으로 제고하는 촉매가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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