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박근형, 백발 노장의 연기 차력쇼 '세일즈맨의 죽음' [리뷰]

9 hours ago 2

/사진=(유)쇼앤텔플레이, (주)T2N 미디어

/사진=(유)쇼앤텔플레이, (주)T2N 미디어

"그 아이가 날 좋아합니다."

외로웠던 젊은 날의 실수로 가슴 속에 죄책감을 안고 살아가던 가장은 그의 비밀을 가족 중 유일하게 알고 있던 장남이 자신을 미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17년 만에 깨닫곤 울컥하며 감격한다. 그리고 그 아이를 위해 인생을 건 결단을 내린다.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은 이 결심을 위해 3시간을 쉼 없이 휘몰아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 7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M시어터에서 개막한 '세일즈맨의 죽음'은 연극계 3대상인 퓰리처상, 토니상, 뉴욕 연극 비평가상을 모두 휩쓴 명작으로, 1930년대 미국 대공황 시기를 살아가는 4인 가족의 이야기를 담았다.

30년 넘게 세일즈맨으로 미국 전역을 누비던 가장 윌리 로먼은 젊은 시절 능력 있는 영업 사원이었고, 두 아들에게 존경받는 아빠이자 아내에게 사랑받는 남편이었다. 하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회사에서의 입지는 좁아지고, 아이들과의 관계는 멀어졌다. 특히 장남 비프와는 눈만 마주쳐도 말다툼이 날 정도다.

/사진=(유)쇼앤텔플레이, (주)T2N 미디어

/사진=(유)쇼앤텔플레이, (주)T2N 미디어

비프에게도 사연은 있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 3개의 대학교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을 정도로 촉망받는 럭비 선수였고, 그 지역 스타였다. 하지만 34살의 그는 변변한 직업도 없이 떠돌이 인생을 살고 있다. "게으르다"는 잔소리은 상처가 되고, "넌 잘될 거다"는 기대감은 부담이 된다.

극은 윌리의 환각을 통해 아름답고 행복했던 과거와 비극적인 현재가 교차해서 선보여진다. 윌리에겐 세일즈맨으로서 전성기였고, 비프에겐 럭비 유망주로 주변의 관심과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시기와 눈만 마주쳐도 으르렁거리며 서로를 할퀴는 말을 하고 상처받는 상황이 겹겹이 선보여지면서 극의 몰입도를 높인다.

서로를 사랑하기에 충돌하고, 상처받고, 후회하고, 다시 응원하고 이해하는 과정은 삶의 애환과 빡빡한 현실, 그럼에도 존재하는 인류애를 그려낸다. 성공과 가족,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의 격돌이라는 보편적인 키워드를 내세운다는 점에서 극의 배경과 80여년 차이가 나는 현실과 대입해도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1949년 브로드웨이 초연 후 국내에서도 여러 차례 각색돼 무대에 올려져 다양한 레퍼토리로 사랑받아왔던 '세일즈맨의 죽음'이다. 이번에는 지난 2023년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 올려 매진 사례를 빚었던 버전의 재연작이다. 2013년 연극 '알리바이 연대기'로 대한민국연극대상·동아연극상 등을 휩쓴 김재엽 연출이 이끈다.

주인공 윌리 역은 박근형과 손병호가 더블 캐스팅됐다. 특히 지난해에 이어 다시 무대에 오르는 박근형은 객석의 공기 흐름까지 바꾸는 압도적인 존재감과 열연으로 극을 이끈다.

/사진=(유)쇼앤텔플레이, (주)T2N 미디어

/사진=(유)쇼앤텔플레이, (주)T2N 미디어

환각 속에서 헤매며 알라스카에서 큰 성공을 거둔 형에게 매달리고,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해고당하는 순간까지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한다'고 비는 모습은 애처로움을 자아내고, 아들과 오랜 우정을 쌓아온 친구 찰리와의 갈등 순간에는 폭발적인 에너지를 보여준다. 아들을 위해 가장 비극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결단내는 순간은 '경이롭다'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다.

예수정 역시 2023년에 이어 윌리 곁을 지키며 부자 관계를 중재하는 아내 린다 역을 연기하고, 손숙이 더블 캐스트로 합류했다.

학교 우등생에서 사회 낙제생이 된 아들 비프 역에는 이상윤과 박은석이 발탁됐다. 이상윤은 그동안 '라스트 세션' '클로저' 등 연극 무대에 꾸준히 오르며 매체와는 또 다른 모습을 선보였고, 박은석 역시 '아트', '파우스트', '히스토리 보이즈' 등에서 활약한 바 있다. 드라마로도 익숙한 젊은 배우들이 노련한 노배우와 맞서며 극의 갈등을 이끈다.

인터미션 포함 170분. 오는 3월 3일까지 서울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상연된다.

김소연 한경닷컴 기자 sue123@hankyung.com

Read Entire Artic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