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번째 남산역사탐방 시작에 앞서 독립운동가 안중근 의사의 업적을 기리는 묵념을 하겠습니다. 일동 묵념.”
지난 28일 오후 4시. 서울 남산공원 주차장 한 쪽에 있는 안중근 의사 동상 앞에서 윤도준 동화약품 회장(73)의 묵념을 시작으로 남산역사탐방이 시작됐다. 윤 회장이 2017년 7월 처음 시작한 남산역사탐방은 이날로 55회를 맞았다. 그는 ‘역사와 뿌리를 알지 못하면 바른 정신을 가질 수 없다’는 생각에 8년 전 남산의 역사 현장을 찾아다니는 부정기 탐방 행사를 기획했다.
그동안 동화약품 직원은 물론 인근 학교 학생, 지역 의사회, 약사회 등 다양한 그룹이 역사탐방 손님이 됐다. 입소문이 나자 서울시 공무원이 신청해 윤 회장의 설명을 듣기도 했다. 윤 회장은 코로나19 탓에 외부 모임이 힘들던 2022년엔 그간 진행한 탐방 내용을 책으로 엮어 <푸른 눈썹 같은 봉우리, 아름다운 남산>을 출간했다. 당시 그는 “6·25전쟁이 끝날 무렵인 1952년 전쟁둥이로 태어나 내 나이 칠십, 인생의 사계절 중 겨울을 맞았다”며 “인생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글로 남겼다”고 했다.
이날 탐방은 조선신궁이 있던 한양도성유적전시관을 거쳐 경성신사터, 노기신사터로 이어졌다. 서울애니메이션센터가 있는 한국통감부터, 서울유스호스텔 입구의 통감관저터, 조선헌병대사령부가 있던 한옥마을 등을 거쳐 장충단공원에서 마무리됐다.
‘역사 가이드’로 변신한 윤 회장이 세 시간 남짓 동안 안내한 장소는 일제강점기의 흔적이 그대로 새겨진 한반도의 아픈 상처였다. 그는 “한반도를 침략한 일제의 아지트를 탐방하는 일정”이라며 “비극적 현장을 방문하고 반성해야 또다시 실수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경희대 의대를 졸업한 뒤 정신과·신경과 전문의로 경희대병원 교수 생활을 하던 그는 2005년 동화약품 대표로 취임했다. 70년가량 이어진 가업을 잇기 위해서다. 2008년 회장으로 취임해 경영 활동을 하던 그는 2019년 대표직을 내려 놓고 경영일선에서 물러났다. 지난 19일엔 장남인 윤인호 대표에게 자신의 지분을 증여해 경영권 승계 작업을 마무리했다. ‘남산 역사 가이드’는 그가 선택한 마지막 직업인 셈이다.
역사와 민족에 대한 관심은 윤 회장에겐 또 다른 ‘가업’이다. 동화약품은 독립운동가 민강 선생이 1897년 세운 동화약방이 모태다. 국내 첫 제약사인 동화약방은 윤 회장 조부인 보당 윤창식 선생이 1937년 인수한 뒤 근대적 제약사로 탈바꿈했다. 보당 선생은 항일비밀결사조직인 조선산직장려계를 통해 민족 자립을 도왔다. 그의 아들이자 윤 회장 부친인 가송 윤광열 동화약품 명예회장은 1944년 일제 학도병으로 만주에 끌려갔지만 상하이 임시정부를 찾아가 광복군으로 투신해 중대장으로 활동했다. 당시 활명수는 독립운동가들의 활동 자금을 마련하는 데 쓰이기도 했다.
윤 회장은 탐방이 없는 날에도 매일 남산을 오른다. 그는 “힘이 될 때까지 탐방하며 우리의 얼을 찾을 것”이라고 했다.
이지현 기자 blues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