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리즘에 지친 사람들…스크린을 떠나 향한 '이 곳' [진세인의 공간 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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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루 시자의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 내부 모습 / 사진. ©진세인

알바루 시자의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 내부 모습 / 사진. ©진세인

요즘 사람들은 달린다. 이른 아침 한강변을 가득 채운 러너들, 러닝 크루의 SNS 피드, 마라톤 대회마다 조기 마감되는 접수 창구. 동시에 사람들은 미술관에 간다. 아침 일찍 줄을 서고, 예약을 하고, 때로는 두세 시간을 이동해서 전시 하나를 보고 돌아온다. 표면적으로 이 두 현상은 달라 보인다. 하나는 몸을 쓰는 일이고, 하나는 눈을 쓰는 일이다. 그런데 나는 이 두 가지가 같은 충동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바로 주체성에 대한 요구다.

러닝이 유행하는 이유는 건강 열풍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헬스장은 예전부터 있었다. 러닝이 특별한 건 그것이 철저히 자기 주도적인 행위라는 점이다. 몇 시에 나갈지, 어느 방향으로 달릴지, 언제 멈출지, 모두 내가 결정한다. 달리는 동안 우리는 완전히 자신의 것인 시간 안에 있다. 알림도, 메시지도, 회의도 없다. 오직 호흡과 발 소리뿐이다. 미술관에 가는 것도 같은 이유다. 다만 미술관은 몸 대신 감각으로 그 경험을 만든다.

알고리즘이 침투하지 못한 시간

우리는 오랫동안 콘텐츠를 수동적으로 소비해 왔다. 알고리즘이 추천해 주는 영상을 보고, 거대 플랫폼이 큐레이션한 순서대로 음악을 들었다. 편리했지만, 내가 골랐다는 감각, 내 의지로 여기에 왔다는 감각이 결여되어 있음을 느낀다.

사람들이 미술관에 가는 이유는 그것이 아직 알고리즘이 침투하지 못한 경험이기 때문이다. 그 동인은 타인의 추천, 누군가의 사진 한 장일 수 있어도, 어떤 공간에서 어떤 시간에 작품 앞에 얼마나 오래 서 있을지는 나만이 결정한다.

무엇을 보고 무엇을 건너뛸지, 몇 층부터 시작할지, 오디오 가이드를 들을지 말지. 미술관에서의 시간은 완전히 내 것이다. 플랫폼은 다음 영상을 자동 재생하지만, 미술관은 다음 작품을 강요하지 않는다. 오롯이 본인의 속도로 선택할 수 있는 순간의 연속들이다.

건축을 업으로 삼은 나 역시 미술관에 가면 종종 멈춰 선다. 분석하려고 간 자리에 그냥 서 있게 되는 순간이 있다. 처음에는 당황스럽다. 무언가를 읽어내야 하고 그 의도를 찾아내야 할 것만 같은 직업적 본능이 작동하지 않을 때, 그 공백 속에 전혀 다른 감각이 찾아온다. 그 것이 오히려 좋은 장소와 공간의 증거라고 생각한다. 설명하려는 충동이 멈추는 곳에서 비로소 경험이 시작된다.

건물이 전시가 될 때, 걷는 것 역시 경험이 된다

미술관이 주체성을 돌려주는 첫 번째 방식은 건물 자체가 경험이 되는 것이다. 이런 공간에서 관람객은 그림을 ‘보러’ 가는 것이 아니라 공간을 ‘통과하러’ 간다. 동선이 곧 내러티브가 되고, 걷는 속도가 곧 해석이 된다.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뮤지엄 산' / 사진. ©진세인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뮤지엄 산' / 사진. ©진세인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뮤지엄 산이 그렇다. 플라워 가든에서 시작해 워터 가든을 지나 본관에 이르는 700미터의 여정, 그 걷는 행위 자체가 전시다. 빛과 물과 돌을 재료로 삼은 건축이 관람객의 속도를 조율하고, 멈춤의 순간을 만들어낸다. 서두르는 사람도 이 동선 안에서는 자연스럽게 느려진다. 공간이 그렇게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알바루 시자의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 / 사진. ©진세인

알바루 시자의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 / 사진. ©진세인

알바루 시자의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은 다른 방식으로 같은 일을 한다. 인공 조명을 거의 배제하고 자연광만을 받아들이는 백색 곡면 안에서, 빛이 어떻게 들어오는지를 느끼려면 반드시 멈춰야 한다. 그 멈춤은 누가 강요한 것이 아니라 공간이 자연스럽게 이끌어낸 것이다. 이 공간에서 관람객은 시간의 주인이 된다. 오전에 온 사람과 오후에 온 사람이 보는 빛이 다르고, 맑은 날과 흐린 날의 공간이 다르다. 같은 건물이지만 매번 다른 경험이 된다.

[좌] 환기미술관  [우] 장욱진미술관 / 사진. ©진세인

[좌] 환기미술관 [우] 장욱진미술관 / 사진. ©진세인

환기미술관과 장욱진미술관은 여기에 한 겹을 더한다. 건축이 작가의 정신을 공간으로 번역하는 것이다. 우규승이 설계한 환기미술관은 김환기의 세계를 닮아 있다. 절제된 형태 속에서 깊어지는 울림, 세월이 쌓인 콘크리트의 질감이 화가의 점화들과 같은 언어로 말한다. 최성희와 로랑 페레이라가 설계한 장욱진미술관은 화가의 그림 속 집을 건축으로 번역했다.

다각형의 중정과 방들이 조용히 연결된 이 공간에서 관람객은 장욱진의 내면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경험을 한다. 건축이 작품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건축이 작품의 연장이 되는 것이다. 이런 공간에서 관람객은 수동적인 감상자가 아니라 능동적인 독자가 된다.

스스로를 지울 때, 관람객이 주인공이 된다

미술관이 주체성을 돌려주는 두 번째 방식은, 건축이 스스로를 지우는 것이다. 전면에 나서지 않는 건물은 오히려 관람객을 전면으로 밀어낸다. 공간이 비워질수록 그 안에 있는 사람들로 채워진다.

국립중앙박물관 / 사진. ©진세인

국립중앙박물관 / 사진. ©진세인

성벽을 모티브로 한 국립중앙박물관의 석재 매스 사이로 격자형 천창의 빛이 하루 내내 변한다. 이 공간은 수천 년의 시간을 담기 위해 스스로를 낮춘다. 화려함 대신 묵직함을 선택했고, 그 묵직함이 전시물을 돋보이게 한다. 복도를 걷다 멈추고, 유물 앞에 앉고, 천창의 빛이 바뀌는 것을 올려다보는 것. 이 공간에서의 선택은 모두 관람객의 것이다. 건물이 물러섰기 때문에 가능한 자유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 사진. ©진세인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 사진. ©진세인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은 다른 방식으로 스스로를 지운다. 경복궁 옆 종로 한복판, 과거 기무사 부지에 들어선 이 건물은 거대한 매스를 도심 속으로 열어두는 방식을 택했다. 마당과 골목으로 분절된 공간 구조는 미술관이 닫힌 기관이 아니라 도시의 일부처럼 작동하게 한다. 전시를 보지 않아도 들어올 수 있고, 마당에 그냥 앉아 있어도 된다. 그 허용이 중요하다. 전시가 끝난 뒤에도 사람들이 마당에 남아 있다면, 그것은 공간이 관람객에게 시간을 돌려줬다는 뜻이다. 미술관이 일정을 강요하지 않을 때, 사람들은 비로소 자신만의 속도로 머문다.

감각의 위계를 바꿀 때, 보는 것 너머로 간다

미술관이 주체성을 돌려주는 세 번째 방식은 감각의 우선순위를 바꾸는 것이다. 우리는 보통 미술관에서 눈을 쓴다. 그런데 어떤 공간은 눈보다 다른 감각이 먼저 깨어난다. 그 낯선 순간에 관람객은 자신이 무엇을 느끼는지를 스스로 발견하게 된다.

구마 겐고가 설계한 '오디움' / 사진. ©진세인

구마 겐고가 설계한 '오디움' / 사진. ©진세인

구마 겐고가 설계한 오디움은 이 질문을 가장 직접적으로 던지는 공간이다. 이곳이 담으려는 것은 소리다.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 것. 2만 개의 알루미늄 파이프가 숲처럼 건물을 감싸고, 내부는 알래스카 편백으로 마감된 거대한 공간에 들어서는 순간 향기가 코끝을 스친다.

시각이 아닌 청각과 후각이 먼저 반응하는 공간. 오디움에서 관람객은 보는 것을 넘어 듣는 것을 배운다. 그 낯섦 속에서 관람객은 자신이 평소 얼마나 시각에만 의존해왔는지를 깨닫는다. 감각의 위계가 흔들리는 순간, 우리는 자신이 무엇을 경험하고 있는지를 더 또렷하게 의식하게 된다. 그 의식이 주체성이 된다.

그 경험은 복사되지 않는다

공간이 사람의 태도를 바꾼다는 것을 건축가들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낮고 좁은 복도를 지나 갑자기 열리는 넓은 홀에서 사람들은 숨을 들이쉰다. 높은 천창에서 빛이 내려오는 공간에서 사람들은 저절로 고개를 든다. 이 반응들은 학습된 것이 아니라, 몸의 언어다. 그리고 이 언어는 화면을 통해 번역되고 전달되지 않는다.

그 경험은 복사되지 않는다. 아무리 아름다운 사진으로 담아도, 영상으로 기록해도 몇 인치 전자 기기로는 전달되지 않는 것이 있다. 짧은 시간안에 전달되는 발바닥에 전해지는 바닥재의 질감, 전시실에서 전시실로 넘어갈 때의 공기의 변화, 천장에서 내려오는 빛의 온도. 이것들은 반드시 몸이 거기 있어야 한다. 재생할 수 없고, 대리 경험할 수 없다. 그 불가역성이 사람들을 다시 밖으로 나오게 한다. 그 순간만은 오롯이 나만의 감각이 된다.

달리는 것과 미술관에 가는 것은 결국 오늘날에 필요했고, 필요한 순간이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여기 있고, 이것은 내가 선택한 것이다. 주체성의 시대는 대단한 의지로 시작되지 않는다. 이른 아침 운동화 끈을 묶는 행위에서, 미술관 예약 버튼을 누르는 행위에서, 핸드폰을 내려놓고 낯선 미술관의 계단을 직접 오르는 행위에서 온다. 그 작은 선택들이 정보와 경험이 스크린 너머로 치환되어 범람하는 이 시대에서 가장 신뢰할 감각이기도 하며, 우리가 매일 조금씩 자라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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