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 아들 잃은 이 남자…시력 잃어가면서도 수련 그렸다 [나를 그린 화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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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드 모네, ‘야외 습작, 왼쪽에서 본 여인’, 1886

클로드 모네, ‘야외 습작, 왼쪽에서 본 여인’, 1886

클로드 모네는 이른바 ‘인상주의의 아버지’로 불립니다. 모네가 그린 수련은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죠.

하지만 인상주의라는 단어가 “인상밖에 그리지 못했다”며 그를 조롱하던 평론가의 말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믿어지시나요.

모네는 사람들로부터 작품을 인정받기까지 약 20년이 걸렸습니다. 20여년의 세월 동안 모네는 그림을 그리며 가난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으로서 작품이 팔리지 않아 회의를 느끼기도 했죠.

어려움 속에서도 모네는 끈질기게 자신의 예술을 고수했습니다. 그는 평생에 걸쳐 빛을 탐구했고, 변화하는 순간을 포착하려고 했습니다.

모네의 작업실은 바깥에 있다

1840년 태어난 모네는 어렸을 때부터 그림을 잘 그리는 아이로 동네에서 유명했습니다. 모네는 16세에 관심을 풍경화로 돌렸습니다. 당시 만난 화가 외젠 부댕이 그에게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는 방법을 알려줬기 때문입니다. 부댕은 밖에서 그림을 그리는 ‘외광파’ 화가였습니다.

당시 많은 화가가 밖에서 스케치한 후 실내에 들어와 채색했지만, 외광파는 모든 그림을 밖에서 그렸습니다.

화가로 데뷔하기 위해서는 프랑스의 살롱전에서 인정받아야 했는데요. 살롱전에서 성공하려면 전통적인 아카데미 미술을 따라야 했습니다. 풍경화보다는 인물화를, 일상의 모습보다는 종교와 역사, 신화 등을 주제로 해야 했죠.

잘 나가는 그림은 이른바 그림체도 정해져 있었습니다. 원근법과 명암법을 철저하게 따라야 했고, 윤곽선을 깔끔하고 명쾌하게 처리해야 했습니다. 채색할 때는 붓 자국이 보이지 않아야 했죠.

당시 모네를 비롯한 젊은 예술가들은 이런 아카데미 교육을 거부했습니다. 사진이 발명된 후, 그림으로 현실을 정확하게 재현해야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퍼지기 시작하던 때였습니다.

클로드 모네, ‘라 그르누예르’, 1869

클로드 모네, ‘라 그르누예르’, 1869

모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모네는 자신이 보고 느낀 방식으로 자연의 선과 형태, 색채를 충실하게 묘사하고 싶었습니다. 그의 관심사는 빛에 비친 자연과 물가의 풍경이었습니다.

모네는 비슷한 생각을 가진 화가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프레데리크 바지유, 알프레드 시슬레 교류했죠.

모네와 그의 화가 친구들은 야외로 나가 햇빛 아래 자연이 변화하는 순간 순간을 포착했습니다. 이들이 선택한 소재는 대기, 물, 안개, 눈, 바람 등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었습니다.

클로드 모네, ‘아르장퇴유의 요트 경기’, 1872

클로드 모네, ‘아르장퇴유의 요트 경기’, 1872

1870년대 초 모네는 아르장퇴유에서 동료 화가들과 함께 그림을 그렸습니다. 에두아르 마네와 르누아르가 이웃이었습니다. 시슬레도 아르장퇴유를 이따금 방문했습니다. 이들은 이곳의 경치를 그렸습니다.

조롱받은 인상주의

하지만 이들의 그림은 10년이 넘도록 살롱에서 거부당했습니다. 모네는 그의 스승 부댕을 비롯해 르누아르, 폴 세잔, 카미유 피사로, 베르트 모리조, 시슬레 등과 함께 자체적인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전시회를 본 평론가들은 악평을 쏟아냈습니다. 이들을 아마추어로 취급했죠.

특히 ‘인상주의’라는 이름은 모네의 작품 ‘인상, 해돋이’에서 비롯됐습니다.

클로드 모네, ‘인상, 해돋이’, 1872

클로드 모네, ‘인상, 해돋이’, 1872

프랑스 르아브르 항구의 아침 풍경을 그린 그림인데요. 비평가 루이 르루아는 이렇게 평가했죠.

“인상이라고! 나도 확실히 그렇게 생각했다. 나 역시 인상을 받았으니까. 요컨대 인상이 그려져 있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어딘지 방자하고, 어딘지 미적지근하다. 붓질에 자유와 편안함이라니! 미숙한 벽지조차도 이 해안 그림보다는 더 완성적일 것이다”

‘인상주의’라는 이름은 화가들을 조롱하기 위해 쓰인 셈입니다

클로드 모네, ‘카퓌신 대로’, 1873

클로드 모네, ‘카퓌신 대로’, 1873

당시 모네가 선보인 ‘카퓌 대로’도 비웃음거리가 됐습니다. 모네는 가로수 길을 지나다니는 행인들의 모습을 가볍게 붓질로 처리했습니다. 그에게는 인물 개개인이 아니라 안개 낀 거리의 모습과 빛의 인상이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감상자는 작품 전체에 시선을 두게 됩니다.

르루아는 이 작품을 보고 “내가 카퓌신 대로를 거닐고 있으면 저렇게 보인다는 거요? 놀라워! 당신 지금 놀리는 건가?”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평가에도 모네는 자기 작품의 가치를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대중이 자신의 그림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네가 사랑한 여인

모네에게는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에게 모델을 서줬던 카미유입니다. 모네는 인물화보다는 풍경화를 훨씬 많이 그렸는데요. 그가 그린 인물화 중 상당수는 카미유를 그린 그림입니다. 모네의 가족들은 그가 천민 출신이던 카미유와 결혼하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하지만 모네는 극심한 반대를 무릅쓰고 카미유와 가정을 꾸립니다.

클로드 모네, ‘카미유(녹색 드레스를 입은 여인)’, 1866

클로드 모네, ‘카미유(녹색 드레스를 입은 여인)’, 1866

모네는 1866년 애인인 카미유를 그린 ‘녹색 옷의 여인’으로 살롱전에서 호평을 얻은 바 있습니다. 사람들은 녹색과 검정색으로 된 실크 드레스의 질감을 잘 표현했다고 칭찬했죠.

클로드 모네, ‘정원의 여인들’, 1867

클로드 모네, ‘정원의 여인들’, 1867

하지만 이후 살롱전에 출품한 ‘정원의 여인들’은 낙선했습니다. 카미유는 그림 속 네 인물들의 다양한 포즈로 모델을 서줬는데요. 모네는 가로 2.5m, 세로 2m의 대형 캔버스를 처음부터 끝까지 야외에서 그렸습니다. 이 작품에서도 모네는 빛을 세심하게 표현했습니다. 햇빛이 내리쬐는 중앙의 흰 꽃은 밝은 흰 색을 띄고 있습니다. 나무 아래 앉아 있는 여성의 옷에는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클로드 모네, ‘점심’, 1868~1869

클로드 모네, ‘점심’, 1868~1869

아들 장이 태어난 후 행복한 시절을 그린 그림입니다. 의자에 앉은 카미유가 아들을 사랑스러운 눈길로 쳐다보고 있습니다. 모네는 아이가 자라는 것을 보면서 기쁨을 느꼈습니다.

클로드 모네, ‘산보, 파라솔을 든 여인’, 1875

클로드 모네, ‘산보, 파라솔을 든 여인’, 1875

‘산보, 파라솔을 든 여인’은 카미유와 아들 장을 그린 그림입니다. 바람이 부는 화창한 날 두 사람이 산책하며 모네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모네는 카미유의 치마를 통해 바람이 부는 모습을 표현했죠.

클로드 모네, ‘일본 전통의상을 입은 카미유’, 1876

클로드 모네, ‘일본 전통의상을 입은 카미유’, 1876

모네가 자포니즘에 빠졌던 것을 엿볼 수 있는 그림입니다. 벽에 일본풍 부채가 붙어있고, 카미유는 사무라이가 그려진 붉은색 일본 전통의상을 입고 있습니다.

작품이 잘 팔리지 않으면서 모네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의 후원자였던 에르네스트 오슈데는 모네의 작품을 많이 샀는데요. 그가 파산하면서 모네의 수많은 작품이 경매에 헐값에 팔렸습니다.

1870년대 후반, 모네는 후원자들에게, 그리고 친구들에게 구걸하는 편지를 써야 했습니다. 다음은 모네가 마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그저께부터 돈 한 푼 없는 신세가 됐습니다. 정육점도, 빵집도 더 이상 외상을 주지 않는군요. 비록 미래에는 희망이 있다 해도 지금 상황은 너무나 어렵습니다. 편지를 받는 즉시 20프랑만 빌려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면 얼마 동안 견딜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875년 6월 28일)

클로드 모네, ‘임종에 든 카미유’, 1879

클로드 모네, ‘임종에 든 카미유’, 1879

1879년에는 사랑하는 아내 카미유가 죽었습니다. 카미유는 32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작품은 카미유가 세상을 떠난 이른 아침, 첫 햇빛이 방안을 비출 때 모네가 그린 그림입니다.

눈을 감은 카미유의 얼굴이 보입니다. 회푸른 색으로 표현된 카미유를 붉은 햇빛이 비추고 있습니다. 카미유의 모습은 평온해 보이지만, 이를 바라보는 모네의 슬픔이 느껴집니다.

연작에 몰두하다

클로드 모네, ‘건초더미(늦여름)’, 1890~1891

클로드 모네, ‘건초더미(늦여름)’, 1890~1891

1890~1891년 모네는 건초더미 연작 25점을 그렸습니다. 같은 대상을 그렸지만 날씨, 시간, 계절이 매번 달라 모네의 건초더미들은 전혀 다른 그림이 됐습니다.

클로드 모네, ‘건초더미(아침 눈의 효과)’, 1891

클로드 모네, ‘건초더미(아침 눈의 효과)’, 1891

어떤 날에는 눈이 내린 후 흐린 날의 건초더미를, 또 다른 날에는 태양이 떠오를 때의 붉은 색이 된 건초더미를 그렸죠. 햇볕이 내리쬐는 여름날의 건초더미를 그리기도 했습니다.

클로드 모네, ‘건초더미(해질녘 가을)’, 1890~1891

클로드 모네, ‘건초더미(해질녘 가을)’, 1890~1891

클로드 모네, ‘햇빛 속의 건초더미, 아침’, 1890~1891

클로드 모네, ‘햇빛 속의 건초더미, 아침’, 1890~1891

건초더미 연작은 좋은 반응을 얻었고, 모네는 드디어 성공했습니다. 이후 모네는 1892년부터 1894년까지 루앙 대성당을 그리는 데 집중합니다.

클로드 모네, ‘루앙 대성당, 서쪽 정문, 햇살’, 1894

클로드 모네, ‘루앙 대성당, 서쪽 정문, 햇살’, 1894

모네가 그린 루앙 대성당 그림은 50점이 넘습니다. 이 연작도 모네가 계절과 시간에 따라 성당이 어떻게 보이는지 탐구한 결과입니다. 같은 대상이지만 빛과 대기의 상태에 따라 화가의 눈에 다르게 비친 성당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클로드 모네, ‘루앙 대성당, 정문(해질녘), 파랑빛과 금빛 조화’, 1892~1894

클로드 모네, ‘루앙 대성당, 정문(해질녘), 파랑빛과 금빛 조화’, 1892~1894

클로드 모네, ‘루앙 대성당, 정문, 아침 햇살의 파랑빛 조화’, 1892~1893

클로드 모네, ‘루앙 대성당, 정문, 아침 햇살의 파랑빛 조화’, 1892~1893

클로드 모네, ‘루앙 대성당, 정문과 생 로맹 탑, 햇살 가득한 파랑빛과 금빛 조화’, 1892~1893

클로드 모네, ‘루앙 대성당, 정문과 생 로맹 탑, 햇살 가득한 파랑빛과 금빛 조화’, 1892~1893

정원을 가꾸다

인정받는 화가가 된 모네는 경제적으로 넉넉해졌습니다. 몇 해 동안 사모은 지베르니 땅에 집을 짓고 정원을 조성했습니다.

클로드 모네, ‘모네의 정원, 붓꽃’, 1900

클로드 모네, ‘모네의 정원, 붓꽃’, 1900

정원사를 고용했을 뿐만 아니라 직접 정원을 가꾸고 관여했습니다. 자기 그림을 이해려면 자신이 직접 가꾼 정원을 보는 게 낫다고 말하기까지 했습니다.

클로드 모네, ‘수련(구름)’, 1903

클로드 모네, ‘수련(구름)’, 1903

이곳에서 모네는 250점이 넘는 수련 그림을 그리며 물과 빛을 탐구했습니다. 모네의 시선은 물로 집중됐습니다. 수면 위에 하늘과 구름과 나무가 비친 모습입니다.

클로드 모네, ‘수련’, 1916

클로드 모네, ‘수련’, 1916

모네는 점차 자신의 그림에 주관적 표현을 강화했습니다. 1903년 ‘수련’에선 물을 투명하게 표현했지만, 1916년 ‘수련’에선 형태와 색채의 조화가 두드러집니다. 모네는 객관적인 거리감을 보여주기 위한 원근법과 입체감을 살리는 기법을 더욱 배제했습니다.

모네의 이런 특성은 자화상에서도 나타납니다.

클로드 모네, ‘베레모를 쓴 자화상’, 1886

클로드 모네, ‘베레모를 쓴 자화상’, 1886

모네는 생전에 자화상을 거의 남기지 않았는데요. 46세의 나이에 그린 이 그림이 현존하는 모네의 첫 번째 자화상입니다. 모네는 두꺼운 스웨터에 푸른색 겉옷을 입고 소박한 베레모를 쓰고 있습니다. 물감을 얇고 빠르게 칠한 흔적이 보입니다. 이마에 파인 주름, 굳게 다문 입술이 강렬한 느낌을 줍니다.

클로드 모네, ‘자화상’, 1917

클로드 모네, ‘자화상’, 1917

이 자화상은 모네가 77세에 그린 그림입니다. 상반신과 배경은 모두 생략하고 얼굴만 그렸죠. 모네의 수련이 점차 간결해진 것과 비슷합니다. 모네는 중년의 자화상에 자신의 이목구비를 뚜렷하게 그렸다면, 노년의 자화상에는 색채를 강조하는 굵은 붓터치로만 입체감을 줬습니다. 턱수염을 노란 빛으로 처리해 개성이 강하게 느껴집니다.

시력을 잃으면서 그린 수련

아름다운 정원에서 평화롭게 생활했을 것 같지만, 70대의 모네는 힘든 일을 연달아 겪습니다. 시력이 점점 안 좋아졌는데, 양쪽 눈이 백내장이라는 진단을 받습니다. 야외에서 순간을 포착해 그림을 그리던 그에게 절망적인 일이었습니다.

클로드 모네, ‘수련 연못의 다리’, 1899

클로드 모네, ‘수련 연못의 다리’, 1899

이 작품은 모네가 정원에 설치했던 일본식 다리를 그린 그림입니다.

클로드 모네, ‘일본풍 다리’, 1890년경

클로드 모네, ‘일본풍 다리’, 1890년경

시력이 안 좋아지면서 모네는 이 다리를 이렇게 표현했죠. 백내장 때문에 형태와 색채를 명확하게 구분하지 못하게 됐습니다.

1911년에는 두 번째 아내였던 알리스, 1914년에는 장남 장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랑하는 이들을 잃으면서 모네는 우울증에 빠졌고 그림을 그리려는 의욕을 잃었습니다. 그에게 위로를 건넬 친구들도 곁에 없었습니다. 피사로, 세잔 등 그의 오랜 벗들은 이미 사망했고, 1919년 르누아르도 세상을 떠났습니다.

모네의 절친한 친구인 정치가 조르주 클레망스는 그에게 국가에 헌정할 수련 연작을 제작해달라고 설득했습니다. 이를 수락한 모네는 여생을 수련 그림을 그리는 데 몰두합니다.

백내장이 심해지면서 모네는 세 번의 눈 수술을 했습니다. 하지만 예전과 같이 물감 튜브의 색을 구분하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결국 그는 기억에 의존해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렇게 작품 활동에 매진한 모네는 수련 대장식화를 완성하고 1926년 8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모네의 수련 대장식화를 전시하는 오랑주리 미술관은 이제 ‘인상주의의 시스티나 성당’이라고 불립니다.

클로드 모네, ‘구름, 대장식화’, 1920~1926 (그림을 클릭하면 확대해서 보실 수 있습니다)

클로드 모네, ‘구름, 대장식화’, 1920~1926 (그림을 클릭하면 확대해서 보실 수 있습니다)

클로드 모네, ‘버드나무가 드리워진 아침, 대장식화’, 1920~1926  (그림을 클릭하면 확대해서 보실 수 있습니다)

클로드 모네, ‘버드나무가 드리워진 아침, 대장식화’, 1920~1926 (그림을 클릭하면 확대해서 보실 수 있습니다)

클로드 모네, ‘녹색 그림자, 대장식화’, 1920~1926  (그림을 클릭하면 확대해서 보실 수 있습니다)

클로드 모네, ‘녹색 그림자, 대장식화’, 1920~1926 (그림을 클릭하면 확대해서 보실 수 있습니다)

1920년 수련 대장식화를 그리고 있는 클로드 모네

1920년 수련 대장식화를 그리고 있는 클로드 모네

모네는 대상을 끝없이 탐구하며 자연의 무한한 모습을 다양하게 표현했습니다. 흔한 건초더미를 그리더라도 시간과 계절을 달리해 스무번 넘게 그렸죠. 또 같은 방식으로 루앙 대성당을 50번 넘게, 수련을 250번 넘게 그렸습니다.

모네는 시력을 잃어가면서도 붓을 끝까지 놓지 않았습니다. 그 덕분에 100여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그의 아름다운 작품을 보며 감동을 느낄 수 있게 됐습니다.

<참고 자료>

-크리스토프 하인리히(2020), 클로드 모네 : 1840-1926 :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실의 얼굴을 포착하다, 마로니에북스

-데브라 맨코프(2016), 모네가 사랑한 정원 : 화가이자 정원사, 클로드 모네의 그림과 정원에 관한 에세이, 중앙Books

-바네사 가비올리·로베르토 타시(2007), 모네, 예경

-소피 포르니 다게르(1994), 클로드 모네 = Monet, 열화당

-윌리엄 C. 세이츠(1991), 클로드 모네, 중앙일보사

[나를 그린 화가들]은 자화상을 통해 예술가의 삶과 작품 세계를 탐구하는 연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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