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이 건너간 자리 삶은 이어진다 박동하는 파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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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이 건너간 자리 삶은 이어진다 박동하는 파도처럼

입력 : 2026.01.25 17:03

연극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
심장이식 둘러싼 24시간 그려
기증자·의사·수혜자 일상 포착
16개 배역, 배우 1명이 연기해
감각적 조명·음향·영상 돋보여

연극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의 한 장면. 김신록 배우가 시몽이 파도를 타는 모습을 연기하고 있다. 일다프로젝트

연극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의 한 장면. 김신록 배우가 시몽이 파도를 타는 모습을 연기하고 있다. 일다프로젝트

프랑스 북부 해변의 어느 일요일 오전 5시 50분. 19세 청년 시몽은 밀려왔다가 부서지는 파도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기다리던 파도가 찾아오자 서핑 보드에 몸을 맡기고 자유를 만끽한다.

그러나 그날의 아침은 그의 마지막이 된다. 돌아오는 길 교통사고를 당한 시몽은 여전히 뛰고 있는 심장을 지닌 채 뇌사 상태로 병원에 옮겨진다. 서울 중구 국립정동극장에서 공연 중인 연극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는 시몽의 심장이 새로운 몸으로 이식되기까지의 24시간을 고스란히 따라간다.

프랑스 작가 마일리스 드 케랑갈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작품은 프로젝트그룹 일다가 무대화했다. 2019년 국내 초연 당시 전석 매진을 기록하며 화제를 모았고, 삼연부터 손상규, 김신록, 김지현, 윤나무 등이 고정 멤버로 참여하며 어느새 다섯 번째 시즌을 맞았다.

작품은 장기 이식이라는 사건을 다루지만, 무대 위에 펼쳐지는 것은 엄숙하거나 거대한 비극이 아니다. 오히려 그 주변을 둘러싼 수많은 일상의 순간들이다. 파도를 타던 청년의 환호, 그를 맞이한 응급실 간호사가 떠올리는 지난밤 연인과의 대화, 소식을 먼저 접하고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야 하는 어머니의 심정,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축구 경기를 기다리다 심장 이식 수술 소식에 급히 길을 나서는 의사, 수술대 위에서 오가는 건조한 농담까지. 작품은 이식 수술을 둘러싼 다양한 이들의 삶의 면면을 비춘다.

이 수많은 군상은 단 한 명의 배우가 100여 분에 걸쳐 연기한다. 뇌사 상태에 빠진 시몽과 그의 부모, 연인, 장기 이식 코디네이터, 심장내과 의사, 심장을 이식받는 50대 여성 클레르, 그리고 장기 이식의 결정적 기반이 된 '뇌사' 개념이 처음 제시된 1959년 의학계 발표 장면까지 총 16명의 인물이 무대에 오른다. 1인극 형식으로 무대 위에는 배우 한 명과 책상, 의자 몇 개뿐이지만 빈틈은 느껴지지 않는다.

조명과 음향, 영상, 그리고 배우의 연기가 정교하게 맞물려 작동하며 극장을 가득 채우기 때문이다. 박동하는 심장 소리와 몰아치는 파도 소리 등 연극적 요소는 모두 정확한 타이밍에 맞춰 감각적으로 배치된다. 다섯 번째 시즌에 접어든 공연답게 무대의 완성도는 한층 단단해졌다.

특히 수술 장면의 연출은 압권이다. 개복 수술 과정에서 시몽의 몸이 벌어지는 순간은 점차 확장되는 흰 조명으로 표현된다. 그 빛 사이를 오가는 배우의 섬세한 손짓은 실제 외과의사의 수술 장면을 연상케 한다. 심장은 하나의 핀 조명으로 형상화된다. 배우는 손 위에 놓인 빛을 실제 심장처럼 들어 올려 새로운 수혜자에게 옮긴다. 삶의 빛이 다른 몸으로 건너가는 이 순간은 과장 없이도 성스럽게 다가온다.

공연 전반에 반복되는 파도의 모티브 역시 인상적이다. 시몽이 서핑을 하던 초반 장면에서 울리던 파도 소리는 수술실에서도 다시 등장한다. 시몽의 심장을 적출하기 직전, 유족의 뜻에 따라 장기 이식 코디네이터는 그의 귀에 워크맨 이어폰을 꽂아준다.

순간 바다의 파도 소리가 다시 한 번 극장을 메운다. 파도는 시몽의 기억이자 호흡이며, 심장의 리듬으로 기능한다. 이후 심장이 이식되는 장면에서는 영상으로 구현된 파도가 무대를 덮치며 새로운 삶의 시작을 암시한다.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가 특별한 이유는 이처럼 무거운 주제를 다루는 태도에 있다. 작품은 장기 이식을 장중하게 다루거나 안타까운 죽음을 비극적으로 몰아가지 않는다. 대신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을 때, 우리가 익숙하게 지나쳐온 일상이 어떻게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보이기 시작하는지를 직접 경험하게 해준다.

결국 이 작품이 말하는 숭고함은 특별한 비일상적 사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관점의 문제에 가깝다. 아직 세차게 뛰고 있는 심장 곁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바라본 일상은 어느새 성스러움을 획득한다.

공연이 끝난 뒤에도 파도는 멈추지 않는다. 극장을 나서는 관객을 맞이하는 로비의 파도 영상은 긴 여운을 남긴다. 죽음의 저편에서 바라본 일상은 이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살아 있다'는 사실은 이전보다 조금 더 무겁고, 동시에 선명해진다. 저마다의 심장 박동을 조금은 더 간절하게 느끼게 된다.

연극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는 국립정동극장에서 3월 8일까지 공연된다.

[구정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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