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싸워도 언제나 약한 척 엎드리고, 죽어도 고발하러 관아엔 들지 않는 것.
(我有一方便, 價値百匹練. 相打長伏弱. 至死不入縣.)
―‘누락된 시제(궐제·闕題)’·왕범지(王梵志·약 590∼660)
단순화하면 그지없이 단순하고 파고들려고 하면 마냥 심오하기도 한 화두, 선시(禪詩)의 오묘한 맛이다. ‘좋은 방책’이라기에 무슨 대단한 처세술인가 했더니 그저 참고 견디는 게 ‘흰 비단 백 필’의 값어치를 갖는 묘책이란다. 하나 이 단순한 이치를 실천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세상과 다투지 않고 세상사 까탈스럽게 따지지 않는 게 어지간한 내공이나 도심(道心) 없이는 불가능할 테다.
시인의 화두는 되씹을수록 알레고리가 모호해진다. 두 갈래 상반된 메시지가 읽힌다. 마찰을 피해 타협하고 조화를 이루라는 소극적인 처세술, 그것은 스스로든 혹은 누군가를 향해서든 무욕과 허심(虛心)의 지혜를 일깨우려는 데서 우러난 것이겠다. 반면, 허물어진 세상의 질서에 고분고분 순종하고 인내하는 나약한 인성에 대한 풍자일 수도 있다. 이 경우 비겁하게 굴종하느니 진리를 좇아 분노하고 적극적으로 반항하라는 메시지를 반어적으로 질타한 것이겠다.시적 심미감보다는 풍자와 해학미가 뛰어나고 잠언(箴言)의 의미가 농후한 왕범지의 시. 사대부들은 고아(高雅)한 취미와는 거리가 먼 저속한 노래라 매도했지만 당 초엽 민간에서는 널리 유행했다. ‘궐제’는 시제가 일실(逸失)되었다는 의미로 의도적으로 제목을 달지 않은 무제시와는 구분된다.
이준식 성균관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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