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군대 침투한 잔혹 영상
법적 효력 없는 가짜 면죄부
텔레그램선 억대 판돈 도박판
폭력 영상이 돈 되는 생태계
“기업 책임 묻는 입법 서둘러야”
지난해 4월 20대 중반 남성이 지인에게 ‘빌려준 400만 원을 갚으라’고 하자 돌아온 답이다. 야차룰은 상호 합의로 맨손 격투를 벌이는 방식을 뜻하는 은어다. 피해자는 부산 북구 구포역 광장에서 돈을 빌려 갔던 지인에게 만나자마자 멱살을 잡힌 채 폭행당했다. 얼굴 뼈가 부러지는 등 전치 82일의 중상을 입었다. 가해 남성은 그해 9월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최근 이처럼 서로 ‘신고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쓴 뒤 싸우는 행태가 일상 곳곳으로 번지고 있다. 유튜브 등 플랫폼에서 인기를 얻은 ‘격투 콘텐츠’가 스포츠의 탈을 쓰고 일반인에게 퍼지면서 마치 합법적인 갈등 해결 수단처럼 둔갑하는 모양새다. 플랫폼이 사실상 방치하는 자극적인 폭력 콘텐츠가 모방 범죄를 부추기고 현실의 폭력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 교실에서 군부대까지 번진 ‘각서 싸움’
최근엔 서울 금천구의 한 헬스장에서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30대 헬스장 트레이너가 동료 트레이너에게 “‘맞짱’(맞싸움) 뜨고 신고하기 없기”라는 각서를 쓰게 하고 때려 지난달 12일 특수상해 등 혐의로 고소당한 것이다.
학생 사이에선 이런 싸움을 일종의 놀이로 인식하는 분위기마저 형성됐다. 서울 동대문구에 사는 김모 군(12)은 “학교에서 야차룰을 모르는 친구가 없다. 쉬는 시간에 야차룰로 붙자고 합의하고 싸우는 일이 자주 있다”고 말했다. 서울 송파구의 한 중학생(14)도 “야차룰은 ‘신고하지 않는다’는 암묵적인 약속”이라며 “크게 다쳐도 비겁하다는 소문이 두려워 학교나 부모에게 알리지 않는 경우도 많다”고 전했다.● ‘신고 않기’ 각서는 법적 효력 없어이런 싸움을 벌이는 이들은 각서가 폭행의 면죄부가 된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거의 효력이 없다는 게 변호사들의 시각이다. 민법상 도덕관념이나 사회 상규에 반하는 계약의 효력은 인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피해자가 원치 않으면 처벌할 수 없는 ‘반의사불벌죄’인 폭행죄와 달리 피해 정도가 심한 상해죄는 합의 여부와 상관없이 처벌이 가능하다. 형사 전문 곽준호 변호사는 “맨주먹으로 싸우면 통상 전치 2, 3주 이상의 상처를 입는 경우가 흔한데 이는 일반 폭행이 아닌 상해로 적용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1월 인천 옹진군의 해병대 부대에서는 후임병 2명에게 “둘이 싸우면 누가 이기는지 보자. 싸울 때 망을 봐주겠다”며 야차룰을 강요하고 ‘강하게 만들어 주겠다’며 폭행한 한 해병이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2024년에는 인천 부평구에서 30대 여성 2명이 ‘고소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 싸우다 코뼈가 부러지는 등 큰 싸움으로 번져 각각 징역형과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 분노 사회가 빚은 ‘폭력의 아수라판’
전문가들은 이 현상을 단순한 유행이 아닌 제도적 공백과 플랫폼의 방치, 분노를 폭발시키는 사회 심리가 맞물린 구조적 산물로 진단했다. 범죄심리분석관(프로파일러)인 배상훈 우석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폭력 사건이 합의로 무마되는 관행을 학습하면서 ‘합의하면 처벌받지 않는다’는 잘못된 인식이 굳어졌다”고 지적했다.특히 유튜브 등 플랫폼에서 별다른 제재 없이 폭력 영상이 유통되는 영향이 크다는 분석이 나온다. 배 교수는 “플랫폼의 엉성한 규제를 이용해 인지도나 돈벌이를 노리는 ‘잔혹한 영상 놀이’가 활개를 치면서 지금의 아수라판을 만들었다”고 지적했다. 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는 “경제 불안과 부동산 가격 폭등으로 인한 사회 기저의 분노가 심한 우리 사회에선 폭력을 부추기는 콘텐츠의 영향이 더 클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는 또래에게 쉽게 휘둘리는 청소년에게 더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임명호 단국대 심리학과 교수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대한 의존도가 높고 타인의 공격성을 학습하기 쉬운 젊은 층일수록 동조할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 텔레그램서 열리는 ‘현대판 투견장’
인스타그램에서도 야차룰 등 키워드로 검색하면 수십 개의 채널과 수천 개의 게시물이 나타났다. 야차룰 영상만 게시하는 한 계정은 팔로어가 약 2만 명에 달하기도 했다. 이러한 채널은 팔로어를 끌어모은 뒤 채널을 높은 가격에 판매하거나, 불법 도박 사이트 광고를 게재하는 식으로 수익을 얻는다. 실제로 상당수의 관련 채널은 영상 말미에 도박 사이트 주소나 미등록 가상자산 거래소, 해커 구인 등 불법적인 문구를 함께 게재했다.
유튜브에선 인플루언서가 야차룰로 싸움을 벌인 영상을 녹화해 재생산한 채널이 수두룩한데, 1분 남짓인 한 영상의 조회수가 400만 회를 넘기도 했다. 업계 평균치인 조회수 1000회당 수익(RPM) 1000원을 적용하면 해당 영상 한 편만으로 약 400만 원의 수익을 올린 것으로 추정된다. 이윤호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일반인의 싸움에도 돈을 거는 일종의 도박까지 생기는 것은 폭력을 놀이처럼 소비하는 단계에 이른 것”이라며 “국가가 무분별한 폭력 콘텐츠를 방치하는 플랫폼 기업을 강력하게 제재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천종현 기자 punch@donga.com
김다인 기자 daou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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