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3월 글로벌 금융위기 때 원·달러 환율은 1570원대까지 올랐지만 이듬해 1100원대로 내려왔다. 2020년 3월 코로나19 충격 때도 1290원 부근까지 올랐다가 이듬해 1080원대를 회복했다. 환율이 크게 뛰어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내려오는 사례는 지금까지 상식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원달러 환율은 5월 말 이후 단 하루도 1500원 아래로 내려가지 않았다. 6월 29일에는 1545.2원에 마감해 2009년 3월 9일 이후 17년 만에 가장 높았다. 그런데 그로부터 이틀 뒤 정부는 6월 수출액이 1022억달러로 집계돼 사상 처음 월 1000억달러를 넘었다고 발표했다. 수출로 달러를 가장 많이 번 달에 원화값은 17년 만에 가장 낮았던 것.
환율이 오른다는 말은 원화 가치가 떨어졌다는 뜻이다. 1달러를 사는 데 1300원이 필요하던 때보다 1500원이 필요하다는 것은 원화의 달러 구매력이 낮아진 것을 의미한다. 수출이 늘면 달러가 많이 들어오고, 달러가 많아지면 원화값이 올라야 할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번에는 반대였다.
올해 상반기 달러인덱스가 3% 오른 동안 원화 가치는 달러 대비 약 8% 하락했다. G20(주요 20개국) 통화 가운데 원화보다 약세 폭이 컸던 통화는 터키 리라화뿐이었다.
달러 부족이 아니라 원화 매수 부족
한국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자유변동환율제를 채택하고 있다. 정부가 환율을 정하지 않고 외환시장의 주문에 따라 가격이 정해지는 제도다. 원화를 사려는 주문이 많으면 원화값이 오르고, 원화를 팔려는 주문이 많으면 내린다.
이처럼 가격을 시장에 맡겨도 환율이 안정될 수 있다는 논리를 이론적으로 제시한 인물이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이다. 프리드먼은 1953년 논문 ‘변동환율제를 위한 옹호론’에서 환율을 시장에 맡겨도 투기가 가격을 안정시킨다고 주장했다. 지나치게 싸진 통화를 사두면 나중에 그 통화가 오를 때 이익을 낼 수 있고, 이런 거래가 늘어나면 통화 값도 다시 오를 수 있다는 논리였다.
한국에서 그 거래는 두 종류로 나왔다. 하나는 수출기업의 환전이다. 원화값이 떨어지면 한국 제품은 외국인에게 싸지고 수출이 는다. 기업은 직원 월급과 납품 대금, 설비 비용을 원화로 지급해야 하므로 받은 달러를 팔고 원화를 산다. 이 거래가 늘어나면 외환시장에서 원화 매수 주문이 쌓인다.
다른 하나는 외국인의 한국 자산 매수다. 원화값이 떨어지면 주가가 그대로여도 달러로 환산한 한국 주식 가격은 낮아진다. 외국인이 한국 주식을 사려면 먼저 달러를 팔고 원화를 사야 한다. 이 거래도 원화 매수 주문으로 잡힌다.
2009년과 2020년에는 이 두 거래가 실제로 나왔다. 수출기업은 달러를 팔아 원화를 샀고, 외국인은 한국 자산을 다시 샀다. 환율은 그 뒤 하락했다. 올해는 달랐다. 수출기업은 번 달러를 모두 원화로 바꾸지 않았고, 외국인은 싸진 한국 주식을 사기보다 팔았다.
항간의 지적과 달리 일단 현재 고환율 현상은 1997년 외환위기와는 분명히 다르다. 당시 문제는 달러가 없다는 것이었다. 은행과 기업이 외국에서 빌린 단기 부채의 만기가 돌아왔지만 갚을 달러를 구하지 못했다. 외환보유액도 충분하지 않았다.
원화값이 급락한 이유는 나라 전체가 달러를 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은행이 달러를 빌려 원화 자산으로 운용했을 때 남는 이익인 차익거래유인도 0.02%포인트였다. 최근 5년 평균 0.34%포인트에 크게 못 미친다. 달러를 빌리기 어렵다면 이 수치는 보통 높아진다. 지금 수치는 달러 조달 자체가 막힌 상황은 아니라는 뜻이다.
외환보유액이 소폭 줄었지만 이는 한국은행이 국민연금에 달러를 빌려주는 외환스왑 등 시장 안정 조치의 결과다. 국민연금이 해외투자에 필요한 달러를 시장에서 직접 사들이면 환율이 더 오를 수 있기 때문에, 한국은행이 시장 밖에서 달러 수요 일부를 받아낸 것이다.
원화는 달러만이 아니라 주요 교역 상대국 통화 전반에 대해서도 하락했다. 달러 강세만으로도, 달러 조달 위기로도 설명되지 않는다.
수출 달러는 예금과 해외자산으로 갔다
문제가 드러난 곳은 달러를 빌리는 시장이 아니라 달러와 원화를 맞바꾸는 현물환시장이었다. 기업은 수출로 받은 달러를 원화로 바꾸지 않고 보유했고, 국내 투자자는 해외 주식을 사기 위해 달러를 샀고, 외국인은 한국 주식을 판 대금을 달러로 바꿔 나갔다. 달러는 있었지만 달러를 팔고 원화를 사는 거래가 부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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