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미술계가 서구 중심 서사에서 벗어나 아프리카 디아스포라 작가들을 재조명하는 흐름이 완연한 가운데 에티오피아 출신 작가 메리코켑 베르하누(49)의 아시아 첫 개인전 <세포의 기억(Cellular Memory>가 서울 한남동 에스더쉬퍼에서 열린다. 2022년 베니스 비엔날레 본전시를 통해 세계적인 거장으로 발돋움한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정교하게 응축된 신작 회화 6점을 지난 5일 공개했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순백의 나선형 계단과 색채 대비를 이루는 강렬한 컬러의 캔버스들이 관객을 맞이한다.
베르하누가 세계 미술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테이트 미술관 등에 작품을 소장시키기까지의 여정에는 한 인물이 있었다. 에티오피아와 아프리카 디아스포라 작가들을 국제 무대에 소개해 온 아디스 파인아트의 공동 설립자 '라켑 실레'. 2002년 작가가 아디스아바바 대학교를 졸업할 당시 현지는 미술시장 인프라가 전무한 황무지였다. 여성 작가로서 활동 기반을 다지기 어렵던 시절, 라켑 실레는 베르하누의 가능성을 알아보고 국제 미술계로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자처했다.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어 작가는 2017년 미국으로 이주해 본격적인 디아스포라적 삶과 시각 언어를 확장할 수 있었다.
전시 제목인 '세포의 기억'은 세포가 과거의 경험과 자극을 기억한다는 생물학적 개념에서 차용됐다. 작가에겐 에티오피아와 미국, 전통과 현대 사이를 가로지르며 몸에 새겨진 문화적 기억을 의미하기도 한다. 에티오피아 모더니즘 전통을 계승했다는 작가는, 강렬한 원색과 반복적인 장식 패턴을 현대의 추상 언어와 결합했다. 대형 회화 <무제 CXIV>를 비롯한 신작에서는 세포 분열이나 씨앗의 발아를 연상케 하는 초록빛 덩어리와 붉은 구형 세포가 시선을 붙잡는다.
미국 이주 이후 작가는 대량 소비와 기후 변화의 현실에 대면해 캔버스에 '회로 기판'이라는 새로운 도상을 출현시켰다. 신작 <무제 CXVIII>에서는 지층의 단면같은 레이어 아래로 신경계처럼 뻗어가는 회로망이 중첩된다. 푸른빛과 노란빛이 대비되는 <무제 CXXI> 역시 인간의 발 형상과 기하학적 선들이 교차하며 급속한 도시화 속의 긴장감을 드러낸다. 과거 자연과 기술을 대립 구도로 보던 시각에서 나아가, 두 시스템이 상호 침투하며 공존하는 동시대 복합 환경을 담담하게 수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메리코켑 베르하누는 작품에 관람자의 유연한 해석을 위해 별도의 제목을 붙이지 않았다. 관람객이 자신만의 경험을 통해 열린 독해를 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라고. 이번 전시는 8월 14일까지 이어진다.
이해원 기자 umi@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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