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장에서 내지르던 함성이 이제 안방극장까지 넘어오고 있다. KBO 리그가 2024년 사상 처음으로 1000만 관중을 돌파한 데 이어 2025년에는 1231만명으로 역대 최다 기록을 갈아치우며 '국민 스포츠'의 위상을 굳혔다. 현대경제연구원 보고서에 따르면 2025 시즌 KBO가 창출한 소비지출 효과는 1조1121억원, 1인당 굿즈 소비액은 15만7000원에 달했다. 야구장 바깥에서도 야구는 돈이 된다는 걸 숫자가 증명한 셈이다. 그리고 이제 그 바람이 드라마 제작 시장까지 불어왔다. MBC, SBS, tvN, ENA가 나란히 야구 소재 드라마를 편성하면서 올해 하반기부터 내년까지 안방극장에 전례 없는 야구 드라마 러시가 펼쳐진다.
'최강야구'에서 '야구여왕'까지…예능이 먼저 신호탄
야구 콘텐츠 열풍은 예능이 먼저 신호탄을 쐈다. 2022년 JTBC '최강야구'가 은퇴한 레전드 선수들이 현역 팀과 맞붙는 구성으로 야구를 모르는 시청자들까지 끌어당겼다. 이후 야구를 콘셉트로 한 프로그램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현재 KBS 2TV '우리동네 야구대장'이 방송 중이고, 채널A '야구여왕' 시즌2도 오는 9일 첫 방송된다. '최강야구'와의 법적 분쟁으로 유튜브로 플랫폼을 옮긴 '불꽃야구' 역시 여전한 팬덤을 자랑한다.
야구는 이미 단순한 스포츠를 넘어 '팬덤 콘텐츠'로 자리 잡았다. 유니폼, 포토카드, 응원봉 등 아이돌 팬덤 문화와 닮은 소비 방식이 2030 여성층을 중심으로 확산되면서 KBO 팬층의 무게 중심이 바뀌었다. 온라인 티켓 구매 고객 가운데 여성 비율이 40%를 넘고, 20·30대가 전체의 70%를 차지하는 구단도 나왔다.
드라마 제작사들은 이 흐름을 놓치지 않았다. 한 드라마 제작사 관계자는 "수년 전부터 야구 인기가 이어졌고, 인기 있는 콘셉트로 드라마를 만드는 건 당연한 흐름"이라며 "다만 드라마는 기획부터 방영까지 2~3년 정도 시간이 걸리는데, 그 기한이 지금 도래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올해부터 내년까지 "야구 드라마 계속"
현재 방영을 준비 중이라고 알려진 야구 드라마는 MBC 새 금토드라마 '너의 그라운드', tvN 새 드라마 '기프트', SBS 새 금토드라마 '풀카운트', ENA 편성을 논의 중인 '그린라이트', 티빙 오리지널로 알려진 '써닝야구단' 등 다섯 편이다.
가장 먼저 포문을 여는 작품은 한효주, 공명 주연의 '너의 그라운드'다. 단 한 번의 좌절로 선수 생활이 멈춰버린 채 재활 중인 에이스 좌완 투수 강해환(공명 분)이 변호사 출신 스포츠 에이전트 서희승(한효주 분)을 만나 다시 그라운드로 돌아가는 여정을 그린 로맨스 드라맙니다. '유미의 세포들' 시리즈의 이상엽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고, 황해연 작가가 극본을 썼다.
'너의 그라운드'는 스포츠 선수와 에이전트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명작 영화 '제리 맥과이어'의 야구판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한효주는 2016년 드라마 'W' 이후 10년 만의 MBC 복귀작이고, 공명은 2021년 SBS '홍천기' 이후 5년 만의 지상파 주연작이다. MBC로서는 2009년 '외인구단' 이후 17년 만의 야구 소재 드라마다.
김우빈 주연의 '기프트'는 정이리이리 작가의 동명 카카오 웹툰이 원작으로, 불의의 사고 이후 특별한 능력이 생긴 프로팀 야구 코치가 꼴찌 아마추어팀인 덕천고 야구부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벌어지는 한 시즌의 이야기를 그린다. 김우빈은 정 많은 투수 코치 정민용 역을 맡았다. '그들이 사는 세상', '우리들의 블루스'를 연출한 김규태 감독과 '경찰수업' 민정 작가가 의기투합했다. 지난 2월 촬영을 시작해 내년 상반기 tvN 방영을 목표로 하고 있다.
'스토브리그'를 탄생시킨 SBS에서는 배우 김래원을 앞세운 '풀카운트'를 선보인다. '풀카운트'는 프로야구 코치들의 치열한 경쟁 세계를 조명하는 12부작으로, 김래원이 스타즈 코치이자 감독 대행인 황진호 역을 맡는다. "선수로서는 2류, 코치로서는 1.5류"라는 자기 평가를 지닌 이 캐릭터가 극을 어떻게 이끌어갈지가 관전 포인트다.
청춘 배우 최현욱, 정채연 주연의 '그린라이트'는 1990년대 후반을 배경으로 하는 로맨틱 코미디다. 야구밖에 모르던 고교 최고 투수 출신 한태양(최현욱)이 첫사랑을 만나기 위해 법학과에 진학하면서 벌어지는 좌충우돌 캠퍼스 로맨스를 그린다. 당시 체육특기자 전형에서 야구선수가 법학과에 진학할 수 있었던 실제 배경을 설정의 근거로 삼아 현실감을 더했다.
극 중 야구선수 출신 캐릭터를 맡은 최현욱 역시 실제로 고등학교 1학년까지 엘리트 야구를 하던 선수 출신이다. 캐릭터와의 높은 싱크로율로 주목받고 있다. 정채연은 상처와 비밀을 품은 법학과 2학년생 송지우 역을 맡는다.
오정세 주연의 '써닝야구단'은 사회인 야구단을 내세웠다. 'SNL 코리아', '신병' 시리즈 등 히트작을 잇달아 만들어낸 민진기 감독이 기획한 드라마로 3040 유부남 가장들의 연대를 유머와 페이소스로 풀어낼 예정이다. '신병4' 마무리 후 2027년 티빙 공개를 목표로 제작에 들어간다.
이들 작품은 야구를 소재로 삼았지만 각기 다른 방향으로 시청층을 노리고 있다. 청춘 로맨스부터 판타지 휴먼 드라마, 중년 코미디까지 전혀 다른 매력을 내세우며 야구 팬들은 물론 일반 드라마 시청자들까지 끌어들이겠다는 각오다.
'스토브리그'의 성공, 야구 드라마의 자신감
야구 드라마 러시의 기폭제는 야구 자체의 인기도 있지만 2020년 방영된 SBS '스토브리그'의 성공이 있다. 야구장 밖, 시즌 오프 기간 구단 프런트 사무실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라는 이색적인 설정으로 최고 시청률 19.1%를 기록하며 스포츠 드라마의 가능성을 입증했다.
이전에도 야구를 내세운 드라마는 있었지만 흥행하지 못했다면, '스토브리그'는 "야구 드라마가 아니다"고 주장하면서도 그 어떤 작품보다 세심하게 야구단의 현실을 그리며 야구팬들의 과몰입을 이끌어냈다. 야구팬이 아닌 시청자들도 프런트 직원들의 고군분투를 통해 오피스물의 정수라는 평을 보냈다.
여기에 극 중 가상 구단 드림즈의 유니폼, 모자와 굿즈까지 불티나게 팔렸다. 드라마 굿즈가 현실 소비 시장에서도 야구 팬덤의 구매욕을 자극할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증명한 사례다.
'스토브리그' 이후 야구 드라마에 대한 업계의 관심이 커졌고, KBO 인기가 폭발하는 사이 기획된 작품들이 이제 하나씩 시청자 앞에 모습을 드러낼 준비를 하고 있다. 2026년 개막 2주 만에 역대 최소 기간으로 100만 관중을 돌파한 KBO 리그의 흥행 기세가 이 작품들에도 순풍이 될 것이라는 기대가 나온다.
물론 야구 팬층의 높아진 눈높이는 제작진에게 부담이다. '스토브리그'가 현직 야구인 자문을 적극 활용하며 리얼리티를 높인 것과 같이 이번 신작들 역시 현장감을 높이는 데 공을 들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현욱과 같이 실제 선수 출신 배우를 캐스팅하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해석된다.
공개를 앞둔 한 야구 드라마의 제작사 고위 관계자는 "드라마를 준비하면서 극의 몰입도와 현실성을 높이기 위해 자문의 중요성이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며 "역사물 뿐 아니라 전문적인 분야를 다루는 작품은 자문 작업이 굉장히 세심하게 이뤄진다. 이번에 준비 중인 작품도 프로야구 구단을 통해 자문을 구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정덕현 대중문화 평론가는 "프로야구의 인기 배경엔 젊은 여성 세대들의 유입이 있다"며 "그들이 들어오면서 팬덤 문화가 커지게 됐고, 콘텐츠의 멀티 소비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다. 야구 콘텐츠가 많아지고, 드라마까지 나오게 된 건 자연스러운 흐름"이라고 말했다.
이어 "스포츠 경기 자체가 더 재밌기 때문에 스포츠 소재 드라마가 성공을 거둘 가능성은 높지 않다"며 "이전의 야구 팬덤을 끌어모으려면 새로운 것을 다루며 소구해야 하는데, 경기에서 봤던 소재를 다룬다면 한계가 있다.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는 게 관건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팬덤의 '설렘'은 단순 '덕질' 소비를 넘어서 실질적인 경제 지표를 움직이는 '덕질 경제'로 자리 잡았습니다. K-컬처를 매개로 발생하는 모든 현상을 총망라해 대중의 열광이 어떻게 '설레는 소비'로 치환되는지 그 이면의 수익 구조와 비즈니스 모델을 날카롭게 포착하고자 합니다.
김소연 한경닷컴 기자 sue123@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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