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선출 다룬 영화 ‘콘클라베’
추기경 간 거래, 폭로 난무 속에… 낮은 곳의, 권력욕 없는 사제 선출
단련된 역량-위기관리만으로는… 꿈같은 결론 현실화되기 힘들어
韓정치에도 신의 은총 작용하길
성직자들이니 선거 과정이 깨끗할 것이라고? 그럴 리가. 성직자 사회에도 정치라는 것이 있고, 그 정치 속에서 각종 거래와 폭로, 합종연횡과 물밑협상, 논공행상이 진행된다. 마치 대학 총장 선거가 그렇듯이. 저 아래 묻어뒀던 탐욕과 추문이 수면 위로 떠오르고, 그 수면 위로 투서들이 타락한 천사들처럼 날아다닌다. 지긋지긋한가? 이 모든 것이 지긋지긋하면 떠나야 한다. 속세를 떠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종교계마저 떠나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세상을 벗어나게 된다.
각종 거래와 폭로와 합종연횡과 물밑협상과 논공행상에도 불구하고, 시스티나 성당에 모인 추기경들은 마침내 적임자를 교황으로 뽑는다. 교황이 될 가능성이 가장 작았던 사람, 교황이 되려는 욕망이 가장 작았던 사람, 현 종교계에 가장 비판적이었던 사람, 그럼에도 교황에 가장 어울리는 사람을 교황으로 뽑는 데 성공한 것이다. 기적이 아닌가! 리더십 위기에 처한 한국인은 영화를 보는 내내 이 같은 기적이 도대체 어떻게 가능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창문이 박살 난 이후에야 비로소 투표 패턴에 변화가 보인다. 권력의지로 충만한 유력 후보들 대신, 그 어떤 파벌에도 속하지 않아 당선 가능성이 제로였던 빈센트 베니테스 추기경이 마침내 교황으로 선출된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부패한 유력 후보들에게 질린 나머지 추기경들은 가장 유력하지 않았던 후보를 교황으로 선택한 것이다. 실로, 가장 리더가 되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리더에 적합한 사람인지 모른다. 일본 도쿄대 교수가 언젠가 내게 말한 적이 있다. “이곳에서는 총장이 되고 싶다고 말하는 순간 총장이 될 가능성이 사라져요.”
그러나 권력의지가 부족한 인물, 혹은 새로운 인물에게 리더십을 부여하는 것에는 위험이 따른다. 기존 질서에 연루되지 않았기에 개혁할 가능성이 높은 한편 기존 질서의 동학에 무지하기 때문에 실패할 가능성도 크다. 기존 세력은 그를 고립시키려 들 것이고, 고립된 사람은 고립을 타개하기 위해 무리수를 두는 법. 새로운 리더가 성공하는 것은 새롭기에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움에도 불구하고 그만한 역량이 있기 때문이다.
빈센트 베니테스는 선교에 관한 한 가장 험지인 아프가니스탄 카불의 추기경이다. 교황청 정치에는 무지하지만 가장 낮은 곳에서 성직을 묵묵히 수행해 온 인물이다. 그뿐 아니라 그는 기존 교회가 도저히 교황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신체 조건을 갖고 있다. 그는 그런 조건과 길항하며 자신을 단련해 왔다. 강철은 어디서 단련되었는가. 안온한 꿀통이 아니라 불타는 험지에서 단련됐다. 빈센트 베니테스는 단련된 강철이다. 아무리 단련된 강철이 있다고 한들 기존 추기경들이 그를 뽑지 않으면 그만이다. 영화에서 드러난바, 추기경들도 여느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권력욕과 편견의 화신이다.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막판에 가서 마음을 바꿀 수 있었을까. 어떻게 빈센트 베니테스를 교황으로 뽑을 수 있었을까. 이 결말이 무리이자 비현실적이라고 보는 관객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는 그런 일이 기어이 일어났다. 도대체 어떻게 가능했나? 평소 과묵했던 아녜스 수녀와 선거관리위원장 로렌스 추기경의 사려 깊은 선거 관리가 큰 몫을 했다. 그들은 과감하게 유력 후보의 추문을 공개하는 한편 빈센트 베니테스 추기경의 신체 조건 같은 것은 공개하지 않았다. 특히 로렌스 추기경은 위기 관리자에게 생기기 쉬운 권력욕을 통제하는 데 성공했다.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여전히 빈센트 베니테스 추기경 같은 개혁적 인물이 리더로 선출되는 것은 비현실적이라고? 그럴지도 모른다. 이 의심에 답하는 것이 바로 신의 은총이다. 영화 속에는 선거에 임하는 추기경들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부감 숏이 종종 나온다. 그 숏은 인간의 시선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아름다워 신의 시선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그 시선을 통해 영화는 말한다. 적합한 리더를 선출하기 위해서는 신의 은총이 필요하다고. 이 막장의 한국 정치에도 신의 은총이 필요하다고.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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