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라 쓰고 나니[내가 만난 명문장/최여정]

1 day ago 4

최여정 작가

최여정 작가
“사랑이라고 쓰고 나니 다음엔 아무것도 못 쓰겠다.”

―다자이 오사무 ‘사양’ 중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일본을 배경으로 빠르게 몰락해 가는 귀족 집안의 불행을 그린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 ‘사양’. 이 작품은 가세가 기우는 귀족에게 ‘사양족’이란 신조어가 붙을 정도로 일본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소설은 작가의 작품 세계뿐 아니라 그의 개인사가 그대로 투영된 작품이다. 태평양전쟁 중 가족과 함께 고향 쓰가루에 있는 생가에서 종전을 맞이한 작가는 대지주였던 집안이 쇠퇴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체호프의 ‘벚꽃 동산’을 떠올렸다.

“대걸작을 쓰겠습니다. 소설의 구상도 거의 마쳤습니다. 일본판 ‘벚꽃 동산’을 쓸 생각입니다. 몰락 계급의 비극입니다. 이미 제목을 정했습니다. 사양. 기우는 해. 사양입니다.”

‘사양’과 ‘벚꽃 동산’은 여주인과 딸들을 중심으로 가문의 몰락과 격변하는 세상 속에서 삶을 이어 가는 여성들을 그린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사양’의 여주인공은 한 번 결혼에 실패하고 친정집에 돌아온 장녀 가즈코다. 가즈코는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온 남동생 나오지가 따르던 소설가 우에하라에 대한 사랑을 키우며 몇 번의 연서를 보내지만 대답이 없다. 가즈코가 뱀 알을 태우는 소소한 일상을 기록한 1장을 돌연 끝내는 이 문장엔 삶과 사랑에 대한 허무함, 언어로 표현하지 못하는 감정의 충만감이 무작위로 교차한다.

이 책을 펼칠 때마다 낡고 오래된 일본 목조 주택에서 풍겨 오는 나무 냄새, 닳고 닳은 바닥을 디딜 때 나는 삐걱거리는 소리, 비좁은 마당 한편에 위엄 있게 서 있는 기품 서린 소나무 한 그루까지, 오래된 흑백 사진 한 장 같은 풍경이 떠오른다. 다자이 오사무의 글이 어찌나 아름답던지 이 얇은 책을 덮고 나면 현기증이 일곤 했다. 이 인상 깊은 문장은 나의 네 번째 책의 제목이 됐다.

최여정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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