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미 카터 별세(1924~2024)
단임 그쳤지만 퇴임후 왕성한 활동
민주주의 증진·질병 퇴치 앞장서
분쟁지역 평화 중재로 노벨평화상
인권문제 놓고 박정희와 설전도
바이든, 내달 9일 애도일 지정
"세계 변화시킨 명예로운 리더"
트럼프 "카터에 감사의 빚졌다"
비록 재선에 실패한 인기 없는 대통령이었지만 퇴임한 이후 평화 해결사로 활약하며 '가장 위대한 미국의 전직 대통령'이란 칭호를 얻었던 지미 카터 제39대 미국 대통령이 29일(현지시간) 조지아주 고향 마을의 플레인스 자택에서 별세했다. 향년 100세.
카터 전 대통령은 재임 시절 박정희 전 대통령과의 한미 정상회담에서 150분간 주한 미군 철수와 인권 문제 등을 놓고 논쟁을 벌였고, 퇴임한 뒤에는 북한을 3차례 찾아 '해결사' 역할을 자처하는 등 한반도와 깊은 인연을 맺었다.
이날 카터센터는 성명을 통해 카터 전 대통령이 자택에서 가족이 있는 가운데 평화롭게 세상을 떠났다고 밝혔다. 카터 전 대통령은 과거 암 투병을 했으며, 이후에도 여러 건강 문제를 겪었다.
카터 전 대통령은 1962년 조지아주 상원의원 선거에서 당선된 경쟁자가 부정선거로 낙마해 의원직을 거머쥐며 정계에 입문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조지아주지사를 거쳐 1976년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로 선출됐고, 공화당 소속의 제럴드 포드 당시 대통령을 누르며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는 재임 시절 중동 평화 협상 중재에 나서는 등 중동 평화의 기초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78년 9월 안와르 사다트 당시 이집트 대통령과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총리를 대통령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로 초청해 맺은 '캠프 데이비드 협정'이 대표적인 성과로 꼽힌다.
그러나 경기 침체와 인권을 앞세운 '이상주의적' 도덕주의 외교정책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면서 지지율이 추락했고, 1980년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였던 로널드 레이건에게 패하며 연임하는 데 실패했다.
하지만 퇴임 이듬해에 카터센터를 설립하고 평화·민주주의 증진과 인권 신장, 질병 퇴치를 위한 활동에 나서며 '가장 위대한 전직 대통령'이란 별명을 얻게 됐다. 이후 국제 분쟁 지역에서 평화적 해결책을 찾기 위해 중재자로 나선 공로를 인정받아 2002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한반도와의 특별한 인연은 카터 전 대통령의 이력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1979년 6월 29일부터 7월 1일까지 이뤄졌던 카터 전 대통령의 첫 방한 당시 한미 정상회담에서는 정상 간에 정면충돌이 빚어지기도 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과 카터 대통령은 주한 미군 철수와 방위비 확충, 핵무장과 인권 문제 등을 두고 2시간30분간 격론을 벌인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회고록에서 당시 회담을 두고 "그동안 내가 우리 동맹국 지도자들과 가진 토론 가운데 아마도 가장 불쾌한 토론이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카터 전 대통령은 퇴임 후인 1994년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IAEA) 탈퇴를 선언한 '1차 북핵 위기' 당시 6월 15일부터 3박4일간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과 2차례 면담했다. 김 주석이 카터 전 대통령을 통해 김영삼 당시 대통령에게 "언제 어디서든 조건 없이 만나자"는 메시지를 전달하면서 남북 정상회담에 대한 기대감이 고조됐지만, 7월 8일 김 주석이 돌연 사망하면서 회담은 결국 무산됐다.
이후 미국인 억류 사안이 불거진 2010년 8월 '디 엘더스' 소속 전직 국가수반 3명과 함께한 2011년 4월 등 총 3차례 북한을 찾았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다음달 9일을 카터 전 대통령에 대한 애도일로 지정했다. 연말 휴가 중이던 바이든 대통령은 생방송 애도 연설에 나섰다. 그는 카터 전 대통령에 대해 "의미 있고 목적 있는 삶을 사는 게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모범"이라고 강조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카터 전 대통령은 미국의 최고 모습을 체현했다"며 "신과 국민의 겸손한 종이자 세계 평화와 인권의 영웅적 옹호자였고, 도덕적 선명성과 희망찬 비전으로 우리나라를 치켜올리고 세계를 변화시킨 명예로운 리더였다"고 강조했다.
또한 바이든 대통령은 "대통령으로서 그는 정부도 국민만큼 잘해야 한다는 것을 이해했다"며 "그의 특별한 도덕적 리더십을 통해 카터는 의미와 목적으로 가득한 고귀한 삶을 살았다"고 평가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은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트루스소셜을 통해 "그는 모든 미국인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그 부분에 있어 우리는 모두 그에게 감사의 빚을 졌다"고 밝혔다.
카터 전 대통령의 장례식은 국가가 주관하는 국장(國葬) 형식으로 진행된다. 아직 세부 계획은 확정·발표되지 않았지만, 워싱턴DC와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공개 장례 행사가 있을 예정이라고 카터센터는 이날 밝혔다.
[워싱턴 최승진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