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 보면 미쳐버리는 그림이 있다는군. 그림이 얼마나 끔찍한지 차르(황제)께서 전시를 금지하셨어.”
1885년 러시아 제국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 길거리를 오가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런 말이 심심찮게 오갔습니다. 러시아 역사상 처음으로 미술 작품에 내려진 검열 지침이었습니다. 이 그림이 무엇을 의미하길래, 황제는 “사람들이 이 작품을 보지 못하게 하라”는 명령까지 내렸던 걸까요.
광기에 사로잡혀…아들을 죽이다
그림 속 주인공은 16세기 러시아의 황제 이반 4세입니다. 그의 영어 별명은 이반 더 테러블(Ivan the Terrible). 뒤쪽에 있는 ‘더 테러블’은 뇌제(雷帝·번개 같은 황제)로 번역되는데, ‘끔찍할 정도로 강하고 무섭다’는 의미로 해석하면 됩니다. 이반 4세는 이런 호칭에 딱 어울리는 황제였습니다. 그는 강력한 통치로 러시아 영토를 크게 넓히고 국가 시스템을 개혁해 초강대국 러시아의 기틀을 닦은 능력 있는 황제였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는 광기에 사로잡힌 폭군의 면모도 갖고 있었습니다. 이반 4세가 잔인하게 목숨을 빼앗은 귀족과 성직자, 고위 관료의 수는 셀 수 없이 많았습니다.
이반 4세가 처음부터 이렇게 미쳐 있었던 건 아닙니다. 그의 광기가 폭발한 건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난 뒤부터였습니다. 이반 4세는 자신을 미워하는 귀족들이 아내를 독살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지만, 그는 아내의 복수라는 명목 아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처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제정신을 잃고 폭주하던 어느 날. 이반 4세는 임신한 며느리를 ‘옷차림이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마구 때려 유산시키고 맙니다.
아이를 잃은 황태자는 더 이상 아버지의 막장 행각을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이반 4세를 찾아간 황태자는 격렬한 분노를 쏟아냈습니다. “아버지, 정말로 미쳐버린 겁니까!” 하지만 광기에 휩싸인 이반 4세는 되레 벼락같이 화를 냈습니다. “그래, 네놈마저 반역을 꾸미는 거구나.” 그리고 이반 4세는 지팡이를 들어 황태자의 머리를 마구 내리쳤습니다. 머리에 치명상을 입고 쓰러진 황태자. 그리고 갑자기, 이반 4세의 정신이 돌아옵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비로소 깨달은 이반 4세는 공포와 절망에 휩싸였습니다. “오, 내가 무슨 짓을….” 황급히 달려가 아들을 껴안고 머리의 상처를 손으로 막아보려 하지만 소용없는 일. 이미 생명은 아들의 몸을 떠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림에는 그 비극의 순간이 생생히 드러나 있습니다.
황제와 권력자들이 보기에 이 그림은 위험한 그림이었습니다. ‘전제 권력을 휘둘러 자신이 사랑해야 할 민중(아들)을 해치고 있는 황제’를 비판한 것으로 읽힐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 큰 문제는 그림이 너무 잘 그렸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작품에는 보는 사람을 충격에 빠트리고 영혼을 뒤흔드는 힘이 있었습니다.
우려는 사실로 드러났습니다. 화가들의 집단 항의로 검열이 취소되고 작품이 일반 대중에게 공개되자, 그림을 보고 충격에 빠져 실신하는 사람이 속출했습니다. 달려들어 그림을 훼손하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후 이 그림은 삼엄한 경비에도 불구하고 흥분한 관람객에 의해 두 번(1913년, 2018년)이나 찢기고 훼손됐습니다. 이 그림을 두고 “보면 미쳐버린다”는 소문이 돌았던 이유입니다.
흙수저 화가의 성공기
이 그림을 그린 화가는 오늘날 러시아의 ‘국민 화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일리야 레핀(1844~1930)이었습니다. 레핀은 어떤 사람이었고, 왜 이런 그림을 그린 걸까요. 그가 걸어온 길에 답이 있습니다.
레핀은 지금의 우크라이나 남부 지방에서 ‘흙수저’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모님은 신분이 낮았습니다. 농노보다는 사정이 나았지만 마음대로 이사를 다닐 수도 없고, 오랜 기간 군대에 복무해야 하는 데다, 국가가 시키는 대로 공공 공사에 동원돼야 하고 무거운 세금까지 내야 하는 ‘군사 정착민’ 계층이었거든요. 그러니 레핀의 운명은 태어날 때 이미 정해져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는 전쟁에 동원돼 목숨을 잃거나, 가혹한 노역에 시달리다 병이 들어 세상을 떠날 겁니다. 만약 운이 좋다면 평생 가난하게 살다가 늙어 죽겠지요. 태어난 위치에서 남들처럼 살다가 죽는 것. 그게 당연한 시대였습니다.
하지만 레핀에게는 붓과 물감이라는 무기가 있었습니다. 그가 미술을 처음으로 접한 건 7살 무렵. 도시에서 일하는 사촌 형이 수채화 물감을 선물해준 게 계기였습니다. 곧바로 레핀은 그림 그리는 재미에 푹 빠졌습니다. 밥도 먹지 않고, 잠도 자지 않고 그림을 밤낮없이 그리다가 코피를 쏟은 일도 있을 정도였습니다. 레핀의 부모님은 생각했습니다. ‘성당 이콘(성화 聖畵, 종교 그림)을 그리는 기술자를 시키면 되겠구나.’ 그렇게 레핀은 지역의 이콘 화가에게 그림을 배우며 열다섯 살의 나이에 일을 시작하게 됩니다.
천재적인 재능이란 진흙 속에 묻혀 있어도 반짝반짝 빛을 내는 법입니다. 맨 처음 물감을 섞는 허드렛일로 시작한 레핀은 점점 승진해 인물을 그리는 가장 중요한 일을 맡게 됐습니다. 그렇게 그는 불과 열일곱살의 나이에 지역에서 유명한 이콘 화가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여러 마을을 돌아다니며 이콘을 그려주던 그 시절, 레핀은 두 가지 중요한 것을 깨닫게 됐습니다.
첫 번째는 가난하고 평범한 민중에 대한 사랑. 당시 레핀이 만난 러시아 서민들은 모두 러시아 정교회의 독실한 신자였습니다. 이들은 마법 같은 솜씨로 이콘을 그려주고 고쳐주는 레핀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습니다. 없는 살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앞다퉈 레핀에게 음식을 갖다줬습니다. 농사일로 얼굴이 그을리고 주름진 노인들은 그의 손을 꼭 붙잡고 눈물을 글썽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청년, 고마워요. 청년은 꼭 천국에 갈 거예요.” 레핀은 생각했습니다. ‘그림이라는 건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고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힘이 있구나.’
두 번째는 자신의 가능성이었습니다. “미술 대회에서 큰 상을 받아서 국가가 인정한 화가가 되면 자유민 신분을 주는 제도가 있다는군. 한번 도전해 보게나. 자네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아. 다만 그 대회에 참여하려면 넘어야 할 산이 하나 있다네. 수도인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엘리트 예술 학교, 황립 아카데미 학생만 대회에 참가할 수 있거든. 일단 그 학교에 입학해야 할 거야.” 스승의 말을 들은 레핀의 마음 속에는 뭔가 뜨거운 것이 끓어올랐습니다. 머지 않아 레핀은 이콘 화가로 일하며 모은 쌈짓돈을 가지고 수도로 길을 떠났습니다. 그의 나이 열아홉 살이었습니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아카데미 입학시험은 어렵기로 유명했습니다. 게다가 아카데미에서 요구하는 화풍은 레핀이 그리던 이콘과 이론도 기법도 너무나 달랐습니다. 하지만 레핀은 천재적인 재능과 끝없는 노력으로 수도에 도착한 이듬해 1월 그는 아카데미 시험에 합격하는 데 성공합니다. 또다시 1년이 지난 21세 때는 대회에서 상을 받으며 자유민의 신분을 얻었습니다. 기어이 그림으로 팔자를 바꾸는 데 성공한 겁니다.
레핀은 승승장구했습니다. 아카데미를 졸업하는 해 열린 대회에서 그는 ‘야이로의 딸의 부활’로 최고상을 받으며 러시아에서 가장 주목받는 젊은 화가로 떠올랐습니다. 상금과 국비 장학생이 돼 당시 미술의 중심지였던 프랑스 파리에 6년간 유학을 떠날 수 있었습니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 인간을 보다
예나 지금이나 미술 선진국으로 유학을 떠난 화가들은 대개 비슷한 과정을 거칩니다. 처음 선진 미술을 접한 화가들은 큰 충격과 감동을 받습니다. ‘세상에 이런 멋진 게 있었다니!’ 그리고 현지에서 유행하는 화풍이나 기법을 따라 하게 됩니다. 하지만 현지 사람들의 반응은 좋지 않습니다. “이런 건 우리(서양 주류) 미술을 베낀 거잖아. 개성도 없고 깊이도 없어.”
레핀도 비슷한 과정을 겪었습니다. 처음 파리에 도착한 그는 인상주의 화풍에 영향을 받은 그림을 몇 점 그렸지만, 반응은 차가웠습니다. 레핀은 결심했습니다. ‘내가 가장 잘 그릴 수 있는 그림, 나만의 그림을 그리자. 러시아의 역사와 민중들을 그리는 거야. 중요한 주제인 만큼 인상주의 그림보다 좀 더 사실적으로, 무게감 있는 작품을 신중하게 그려야겠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그는 본격적으로 러시아 역사를 주제로 삼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레핀이 신작을 발표할 때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거리는 그림 얘기로 떠들썩해졌습니다. 대표적인 작품이 ‘소피야 황녀’. 17세기 러시아 제국의 섭정으로 최초의 여성 황제가 될 뻔했지만 권력 다툼에서 밀려났고, 결국은 수도원에 갇혀 생을 마감한 황녀 소피야를 그린 작품이었습니다. 이 작품을 그리기 위해 레핀은 소피야가 갇혀 있던 수도원 근처로 집을 옮겨 가며 관련 역사를 1년 넘게 연구했다고 합니다.
작품 속 소피야는 눈을 부릅뜬 채 조용하지만 격렬한 분노를 내뿜고 있습니다. 이는 창밖에 매달린 남자의 시체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 남자는 소피야를 황제로 내세우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던 주동자. 황제는 반란을 진압한 뒤 그를 수도원의 창 바로 앞에 매달아 소피야를 모욕했습니다. 한때는 러시아 제국을 다스렸던 여걸이었지만, 지금 소피야는 방 안에 갇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분노할 뿐인 무력한 존재입니다.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도 소피야 황녀 못지 않게 드라마틱한 작품입니다. 이 그림은 6년에 걸쳐서 그린 레핀의 대표작 중 하나입니다.
추레한 차림으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는 남자. 지금은 지치고 초췌한 중년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그에게도 청춘의 피가 끓을 때가 있었습니다. 젊은 시절 남자는 혁명가였습니다. 목표는 황제를 끌어내리고 민중의 세상을 만드는 것. 그 위대한 꿈을 위해 남자는 모든 걸 바쳤습니다. 동지들의 높은 평가를 받은 덕분에 그는 혁명 조직의 핵심적인 위치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가장으로서의 남자는 무능력하고 무책임했습니다. 그는 아내의 마음보다 황제를 비롯한 적들의 마음을 더 궁금해했고, 두 아이에게 줄 크리스마스 선물 대신 대중들의 마음을 흔들 연말 선전 포스터의 문구를 고민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남자가 집에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하루, 이틀, 일주일, 그리고 몇 달이 지났습니다. 감옥에 갇힌 걸까, 싸우다 죽은 걸까. 하염없이 남자를 기다리던 그의 어머니와 아내는 지쳐갔습니다. 결국 남자의 어머니가 먼저 입을 뗐습니다. “그래,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어. 내가 미안하구나. 이제 아들놈은 죽었다고 생각해야겠다. 우리끼리라도 잘살아 보도록 하자.” 남자가 평소 집에 생활비를 갖다주는 일이 거의 없었기에, 아이러니하게도 남자 없는 생활은 금세 안정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몇 년이 흘렀을까. 평범한 오후, 죽은 줄 알았던 남자가 갑자기 돌아왔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었는지, 시베리아로 귀양을 가 있었는지, 외국에 망명을 다녀왔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어쨌거나 남자는 돌아왔습니다. 기뻐해야 마땅한 일입니다. 하지만 감격의 상봉은 없었습니다. 어른들의 얼굴과 자세에는 긴장감이 역력하고, 아버지의 얼굴을 잊은 딸은 낯선 남자의 침입으로 겁에 질렸습니다. 오직 아빠 얼굴을 기억하는 아들만 반가운 표정을 지었을 뿐입니다. 그래서 제목은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입니다.
실제로 그 장면이 눈 앞에 펼쳐지는 듯한 생생한 묘사 말고도, 이 그림들의 공통점은 하나 더 있습니다. 역사의 거대한 흐름에 휩쓸린 한 인간의 모습을 그렸다는 겁니다. 원대한 포부에 몸을 던졌던 혁명가는, 실은 가족에게도 환영받지 못한 초라한 존재에 불과했습니다. 맨 앞에서 언급했던 작품 ‘이반 뇌제, 자신의 아들을 죽이다’도 마찬가지입니다. 황제라는 위치에 올랐지만 주체할 수 없는 광기 앞에서 그는 무력한 꼭두각시가 되어 사랑하는 자신의 아들을 해쳤습니다. 이를 통해 레핀은 말하는 듯합니다. “정치나 권력은 허상에 불과하다. 그것들에 지나치게 사로잡힌 사람은 결국 자신과 타인을 불행하게 만든다. 우리가 진정 소중히 해야 할 것은 눈앞에 있는 사람, 오직 그것뿐이다.”
인간, 예술
레핀은 항상 정치와 거리를 뒀습니다. 신분이 낮은 서민 출신이었던 레핀은 사실 러시아 제국의 옛 질서와 황제의 전제정치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1905년 1월, 러시아 제국군이 시위대를 진압하면서 유혈사태가 일어나자 레핀이 아카데미 교수직을 사임한 것도 이런 소신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레핀은 1917년 벌어진 러시아 혁명 역시 반기지 않았습니다. 공산주의 체제가 본질적으로 예술의 자유를 제약할 수밖에 없다고 봤고, 급격한 변화는 평범한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레핀은 조국인 러시아(소련)를 등지고 핀란드인이 되기를 택했습니다.
나이가 들며 레핀의 건강은 계속 나빠졌습니다. 하지만 그는 끊임없이 그림을 그렸습니다. 레핀의 건강을 걱정하는 친구들이 붓을 숨기자, 붓 대신 담배꽁초에 물감을 적셔 그림을 그린 적도 있었습니다. 지난날 그림을 너무나 열심히 그린 탓에 레핀의 오른손은 만신창이가 된 지 오래였습니다. 더 이상 오른손으로 붓을 잡을 수 없게 되자 그는 왼손으로 그림을 그리고 오른손으로는 팔레트를 잡았습니다. 오른손 손가락으로 팔레트를 잡는 것조차 불가능해지자 레핀은 끈으로 팔레트를 목에 걸고 작업했습니다.
레핀은 가난했습니다. 그의 대표작 대부분이 러시아에 남아있었기 때문입니다. 건강 때문에 제대로 된 그림을 그릴 수 없었기에, 그는 늘 돈에 쪼들렸습니다. 그런 레핀에게 러시아는 “예술 영웅으로 모실 테니 돌아와서 레닌의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접근했습니다. 하지만 레핀은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러시아로 돌아가면 자신이 원하는 대로 그림을 그릴 수 없을 게 뻔해서였습니다. 그에게는 언제나 인간, 그리고 예술이 먼저였습니다.
끝까지 붓을 놓지 않았던 레핀은 1930년 86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습니다. 죽기 전 친구에게 마지막으로 보낸 편지에 레핀은 이렇게 적었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내가 사랑하는 친구들! 저는 태어나 너무나 많은 행복을 누렸습니다. 제게 삶은 순탄하고 즐거운 것이었고, 과분한 명성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저는 흙 속에 눕게 되었습니다. 저에게 항상 관대했던 이 아름다운 세상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레핀이 세상을 떠나고 10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습니다. 오늘날의 한국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그의 이름은 익숙지 않습니다. 레핀의 작품 속 광기에 사로잡힌 황제, 수도원에 갇힌 황녀, 혁명에 인생을 바친 아버지, 힘겹게 배를 끄는 사람들은 우리가 본 적 없는 완전히 낯선 존재임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러시아 역사가 어땠는지, 그림이 무슨 이야기를 담고 있는지 모르는 사람에게도 레핀의 그림은 여전히 강렬한 인상을 남깁니다. 레핀이 그린 건 역사와 정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한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 하나하나에 관한 이야기였기 때문입니다. 레핀은 언제나 사람들을 똑바로 바라봤고,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애정을 담아 그들을 그렸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가 생생하게 보여주는 옛이야기에 지금도 마음을 쏟게 됩니다.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이번 기사는 Ilya Repin and the World of Russian Art(Elizabeth Valkenier 지음), Russia on Canvas: Ilya Repin(Fan Parker 지음), 천 개의 얼굴 천 개의 영혼 일리야 레핀(일리야 레핀 외 지음, 이현숙 옮김) 등을 참조해 작성했습니다.
<그때 그 사람들>은 미술과 고고학, 역사 등 과거 사람들이 남긴 흥미로운 것들에 대해 다루는 코너입니다. 토요일마다 연재합니다. 쉽고 재미있게 쓰겠습니다. 네이버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6만여명 독자가 선택한 연재 기사를 비롯해 재미있는 전시 소식과 미술시장 이야기를 놓치지 않고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