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위기'땐 기존 계약 파기…EU, 생산명령권 도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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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연합(EU)이 반도체 공급 위기에 대비해 극단적인 대책을 들고나왔다. 역내 칩 제조 업체에 기존 계약을 파기하고 EU 차원에서 지정하는 제품을 먼저 생산하도록 강제하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자동차부터 데이터센터까지 모든 업종에서 반도체가 핵심 부품이 돼 안보 성격이 높아진 데 따른 것이다.

◇위기 때 기존 반도체 계약 파기

'반도체 위기'땐 기존 계약 파기…EU, 생산명령권 도입

29일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EU 집행위원회는 이런 내용을 담은 반도체법(칩스법) 개정안 세부 방안을 다음달 발표할 계획이다. 무기, 의료기기, 디지털 인프라 등과 함께 반도체를 ‘위기 대응 필수’ 품목으로 지정하는 것이 골자다.

이 같은 방안이 실행되면 EU 지역 반도체 제조사는 유사시 이미 체결한 기존 계약을 제치고 EU가 요구하는 주문을 우선 처리해야 한다. 기존 거래처와 맺은 계약을 위반해도 법적 책임은 면제된다. EU가 부과한 생산 의무를 이행하지 않으면 영업일마다 하루 매출의 최대 1.5%에 해당하는 이행강제금이 매겨질 수 있다.

반도체 제조 업체는 생산 칩 종류와 생산량 등을 구체적으로 담은 공급망 역량 관련 정보도 제출해야 한다. 이에 불응하면 EU 집행위는 최대 30만유로(약 5억2500만원) 벌금을 부과할 수 있다.

이번 방안에는 EU가 역내에서 생산되는 반도체의 중앙 구매자 역할을 맡도록 했다. 시장에서 충분한 판로를 확보하지 못한 반도체를 EU 차원에서 사들여 관련 기업을 보호하겠다는 의미로 분석된다.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백신을 공동 구매한 방식을 모델로 삼았다. 칩스법은 EU가 미국과 아시아 반도체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마련했다.

◇방아쇠는 넥스페리아 사태

EU 차원의 반도체산업 규제 강화는 중국의 대만 무력 위협에 뿌리를 두고 있다. 대만은 글로벌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매출의 60% 이상, 최첨단 칩 제조의 90% 이상을 차지한다. EU의 역내 반도체 제조 글로벌 점유율은 10%에 그친다. 2030년까지 시장 점유율을 두 배로 늘리겠다는 당초 목표도 달성이 불투명하다. 사태가 악화해 대만의 반도체 공급이 끊기면 유럽 산업 전반의 위기로 번질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직접적 계기는 지난해 불거진 넥스페리아 사태라는 해석도 있다. 넥스페리아는 중국 기업 윙텍이 소유한 네덜란드 기반 회사다. 자동차에 두루 쓰이는 트랜지스터와 다이오드 등 기초 전력 제어 반도체를 생산한다. 네덜란드 정부가 기술 이전 우려 등을 이유로 이 회사 경영권을 사실상 장악하자 중국 정부가 보복했다. 중국 내 넥스페리아 공장에서 생산된 칩 수출을 막은 것이다. 이에 따라 유럽 자동차업계에 생산 차질이 발생했다.

네덜란드 정부는 외교적 절충 끝에 지난해 11월 경영권을 돌려줬지만 갈등이 아직 봉합되지 않았다. 윙텍은 네덜란드 정부를 상대로 80억달러 규모 손해배상을 요구하며 국제 중재 절차에 들어갔다.

◇한국 기업 영향은 제한적

반도체 비상 권한 신설은 최근 EU의 대중국 통상 전략 변화와 맞물린다. 스테판 세주르네 EU 산업 담당 집행위원은 최근 “중국산 수입품이 화학, 금속, 청정기술 등 유럽 산업에 존재론적 위협을 가하고 있다”며 수입 쿼터와 관세 등 보호 조치를 더 넓게 쓰겠다고 밝혔다. 지난해 EU의 대중국 상품무역 적자는 3590억유로 이상으로 늘었다. 유럽 내부에서는 저가 중국산 제품이 소비자 물가 하락에 도움을 주지만 장기적으로 산업 기반 상실, 일자리 감소 등 취약성을 키운다는 인식이 확산하고 있다.

경제 영역 마찰은 군사 부문으로 번지고 있다. 최근 남중국해에서 벌어진 중국과 네덜란드 간 군사 마찰이 대표적이다. 중국군은 지난 27일 남중국해 시사군도 인근에서 네덜란드 호위함 더라위터르함을 몰아냈다고 주장했다.

칩스법이 한국 기업에 미칠 영향은 제한적일 것으로 보인다. 칩스법 비상 권한의 적용 기준은 EU 역내에 있으면서 EU 보조금을 받은 반도체 공장이다. 해외 기업이라도 EU 보조금으로 운영하는 공장이 있으면 대상이 된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생산 거점은 유럽에 없다.

현대·기아차와 국내 자동차 부품사는 인피니온, NXP 등 유럽계 차량용 반도체 기업에 상당 부분 의존하고 있다. 유럽 내 반도체 위기가 발생하면 한국 완성차와 부품사가 받기로 돼 있던 물량이 후순위로 밀릴 수 있다.

김주완 기자 kjwa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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