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험사 합의 압박에 치료 중단
후유증 부담은 건보로 떠넘겨져
5년여간 국가 재정 지출 4천억
인테리어 업자 김복영(가명·73) 씨는 지난 2월 트럭에서 내리다 뒤따르던 차량에 치이는 사고를 당했다. 극심한 통증으로 한의원에 입원했지만 건강보험심사평가원 기준에 가로막혀 일주일 만에 퇴원해야 했다. 이후 상태는 더 악화됐다. 이제는 물컵조차 들기 어려울 정도로 팔에 마비 증상이 생겨 현장 일은 물론 일상생활까지 힘겨워졌다. 결국 일을 도와줄 사람까지 따로 고용하게 되면서 경제적 부담도 커졌다.
이런 상황에서 김 씨의 정신적 고통을 키운 건 보험사의 대응이었다. 치료가 끝나지 않았는데도 보험사는 지속적으로 합의를 요구했고 “나중에 아프면 건강보험으로 치료받으면 된다”는 메시지까지 보냈다. 김 씨는 “몸은 아직 이 지경인데 보험사는 ‘합의서에 도장만 찍으면 사실상 이중수급 받을 수 있다’는 말만 한다”고 말했다.
직장인 정우빈(가명·32) 씨도 지난 1월 교통사고를 당한 뒤 한달쯤 지나 보험사로부터 합의금 180만 원에 사건을 종결하자는 압박을 받았다. 보험사는 “제도가 바뀌면 앞으로는 치료비를 한 푼도 못 받을 수 있다”며 조기 합의를 종용했다. 정 씨는 사고 이후 통증이 계속됐지만 결국 보험사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정부가 추진 중인 자동차보험 개정안, 이른바 ‘8주룰’이 치료가 시급한 교통사고 피해자들을 오히려 사지로 내몰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8주룰은 경상환자가 4주를 초과해 치료받을 경우 진단서 제출을 의무화하고 8주 이후부터는 치료비 지급 기준을 대폭 강화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보험사들이 제도 변화를 빌미로 압박에 나서면서 환자들은 완쾌되지 않은 상태에서 치료를 중단하거나 경제적 부담을 떠안는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부작용이 환자 개인의 고통에만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전문가들은 보험사의 등 떠밀기식 종용에 조기 합의를 택한 환자들이 이후 교통사고 후유증 치료를 위해 건강보험에 의존하게 되면서 민간 보험사가 부담해야 할 비용이 국가 재정으로 고스란히 전가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
19일 건강보험심사평가원과 감사원에 따르면 2019년부터 2024년 6월까지 5년 6개월간 자동차보험 합의 이후 동일 상병으로 건보 치료를 받아 발생한 지출액은 최소 3899억원으로 집계됐다. 자동차보험환자치료권익연대는 8주룰이 도입될 경우 기존 자동차보험에서 밀려난 8주(60일) 초과 치료비 약 3120억원이 추가로 건보 재정에 전가될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이같은 풍선효과는 학계 연구에서도 확인된다. 국제 학술지 플로스원(PLOS ONE)에 게재된 교통사고 환자 분석 논문에 따르면 환자의 41.4%는 완치 전에 조기 합의를 선택했다. 이유로는 생업 부담(57.2%)과 보험사의 합의 압박(40.6%)이 많았다. 특히 이들은 합의 이후에도 평균 4.14주 동안 건보나 본인 부담으로 치료를 이어간 것으로 조사됐다. 건보 재정 누수가 단순한 우려가 아니라 실제 발생하고 있는 구조적 문제라는 의미다.
정희원 자동차보험환자치료권익연대 대표는 “현재 환자 1인당 평균 24만4700원의 치료비가 건보로 넘어가고 있는데 경상환자가 149만명에 달하는 점을 감안하면 3500억원 이상의 재정 누수가 발생할 것으로 보인다”며 “매년 흑자를 내는 보험사의 이익을 위해 인구절벽으로 재정 고갈 위기에 놓인 건보를 사용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말했다.
정부와 보험업계는 8주룰 추진의 근거로 경상환자의 과잉진료 차단을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의료 현장에서는 이같은 주장의 출발점 자체가 왜곡돼있다는 반론이 적지 않다. 현재 자동차보험 환자의 94%가 경상환자(12~14급)로 분류되는데, 이 비율이 실제 환자의 임상 상태보다 보험사의 상해등급 판단 기준에 크게 좌우된다는 지적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척추질환이다. 건보에서는 척추환자 가운데 디스크 등 중증환자 비중이 약 50%에 달하지만 자동차보험에서는 디스크 환자(9급) 비중이 0.9%에도 미치지 못한다. 사고 등급 판정 권한을 보험사가 쥐고 있는 탓에 의학적 소견이 있어도 환자를 가장 낮은 단계인 12~14급으로 분류하는 관행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는 집중 치료가 필요한 환자들까지 경상으로 묶이면서 충분한 치료를 받지 못한 채 조기 합의와 보상 축소 압박에 내몰리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정 대표는 “디스크 탈출이나 힘줄 파열과 같은 임상적 중증 환자까지 12급으로 묶어버리는 제도적 결함부터 바로잡아야 한다”며 “금융감독원 자료에서 병원 과잉 청구가 전체 보험사기의 단 1%에 불과함이 드러났음에도 이를 구실로 환자의 정당한 치료권을 제한하려는 개정안은 본말이 전도된 규제”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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