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장병호 기자] .60대 A씨는 정년퇴직 이후 특별히 하는 일이 없다. 주변에선 “그동안 고생했으니 푹 쉬는 일만 남았다”고 말하지만, 막상 무엇을 하며 쉬어야 할지 고민이다. 하루는 아내로부터 “할 일 없으면 쓰레기 좀 버리고 와달라”는 말을 들었는데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A씨에게 앞으로 남은 인생은 길게는 30여 년.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막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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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이두희 고려대 경영대학 명예교수(베테랑소사이어티 대표), 윤소영 한국문화관광연구원 연구위원, 송용희 씨, 최은주 씨. (사진=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
초고령화로 100세 시대를 맞이한 지금, 50~60대라면 누구나 A씨와 비슷한 고민을 할 것이다. 과거엔 이들을 생산적인 활동과 무관한 ‘노년층’으로 구분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지금의 50~60대는 높은 교육 수준과 적극적인 정보 수용력, 자발적인 건강 관리와 지속적인 사회 참여와 함께 여가와 문화 활동으로 삶의 질을 높이고자 하는 욕구가 누구보다도 강하다. 50~60대를 ‘신(新)중년’으로 명명하고 이들이 생산적인 여가 문화 활동을 즐길 수 있도록 문화예술교육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문화예술을 통해 신중년의 삶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알아보기 위해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진흥원) ‘생애전환기 문화예술교육 사업’에 참여했던 송용희(68), 최은주(61)씨를 최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만났다. 윤소영(60) 한국문화관광연구원 연구위원, 이두희(68) 베테랑소사이어티 대표(고려대 경영대학 명예교수)를 함께 만나 신중년을 위한 문화예술교육 방향에 대한 전문가들의 의견도 들어봤다.
바쁜 일상에 지친 삶, 문화예술로 돌아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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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용희 씨는 독서 소모임 ‘마고의 이야기 공작소’를 통해 글쓰기를 접한 뒤 마음속 상처를 치유하고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다. (사진=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
“어느 가수가 나이를 먹는 건 ‘익어가는 것’이라고 노래를 했는데요. 주부에겐 익어가는 게 아니라 ‘곪아 터져가는 것’이더라고요.”
송용희 씨의 이야기다. 식당을 운영했던 송 씨는 집과 식당만 오가며 바쁜 엄마이자 아내이며 주부로 평생을 살아왔다. 52세 때 교통사고를 당하면서 건강 문제로 식당 일을 그만두면서 자신의 인생을 뒤늦게 되돌아보게 됐다. 송용희 씨는 자신의 삶이 곪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 송 씨의 삶은 문학을 만나 180도 바뀌었다. 익산여성의전화를 통해 독서 소모임 ‘마고의 이야기 공작소’에 참여하면서였다. 처음엔 사람들과 함께 책을 읽고 토론을 주로 했다. 그러다 같이 소설을 써보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진흥원의 ‘생애전환기 문화예술교육 사업’ 중 ‘문학과 한 달 살아보기’, ‘자연과 함께 한 달 살아보기’ 등에도 참여하면서 곪아 있던 삶도 조금씩 치유됐다.
송 씨가 지닌 마음속 상처는 의료사고로 돌아가신 어머니였다. 자신 때문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는 생각에 우울증을 겪었다. 그러나 글쓰기를 시작하면서 마음속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게 됐다. 이제 송 씨는 시인으로 등단해 작가로도 활동 중이다. 지난해에는 대학에 들어가 미술도 배우고 있다. 송 씨는 “문화예술이 내 인생에 새로운 싹을 틔워줬다”며 “다른 50~60대들도 문화예술과 가까워질 방법만 안다면 더 만족스러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송 씨에게 문학이 삶의 치유가 됐다면, 최은주 씨에게는 연극이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이 됐다. 교사로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던 최 씨는 2023년 은퇴한 뒤 지금은 건강 스포츠 자격증을 취득해 복지관 등에서 강사로 일하고 있다. 인천 지역에서 활동 중인 ‘커뮤니티 시어터 우라통’에서 연극배우로도 활동 중이다. ‘커뮤니티 시어터 우라통’의 이름은 ‘울화통’을 소리 나는 대로 발음한 것이다. 마음에 쌓인 것들을 연극을 통해 다 끄집어내자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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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주 씨는 연극 활동을 통해 어머니에 대한 상처를 치유하고 가족과도 더 깊이 소통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진=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
최 씨에게도 송 씨처럼 어머니에 대한 상처가 있었다. 어릴 적 어머니가 일찍 세상을 떠난 것이 마음에 깊은 상처로 남아 있었다. 최 씨에겐 ‘어머니’라는 단어가 일종의 금기였다. 우연한 기회로 ‘커뮤니티 시어터 우라통’에서 활동하면서 진흥원의 ‘생애주기별 문화예술교육 사업’ 중 하나인 ‘새 어른의 연극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자신의 살아온 이야기를 연극으로 선보이면서 마음속 상처를 직시하게 됐다.
최 씨는 “평소 건강에 예민한 편이었고 남편이 조금이라도 아프면 잔소리를 많이 하기도 했다”며 “연극을 하면서 어릴 적 엄마가 아파서 돌아간 것이 마음속 상처로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남편도 어머니처럼 먼저 내 곁을 떠날까봐 그게 두려워 잔소리를 하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또한 “연극을 통해 마음도 치유하게 됐고 가족들도 서로 더 잘 이해하고 소통하게 됐다”며 “남편도 최근 퇴직 이후 나처럼 새로운 활동을 시작하며 후배들에게 은퇴 이후의 삶을 설계할 것을 조언하고 있다”고 전했다.
송 씨와 최 씨처럼 지금의 ‘신중년’은 문화예술을 통해 여가를 즐기고 싶은 욕구는 누구보다 강하지만 정작 그 방법을 잘 알지 못한다. 전문가들은 신중년이 원하는 것을 제공해주는 맞춤형 교육 프로그램과 정책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여가 통해 자존감 회복…건강한 사회 만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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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소영 한국문화관광연구원 연구위원은 정책에서 소외된 ‘신중년’을 위해 커뮤니티 기반의 문화예술 교육 프로그램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사진=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
‘고령층 문화누림 정책방안 연구’를 진행해온 윤 연구위원은 “신중년은 평생 일을 중심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은퇴 이후 여가와 문화생활도 일하듯이 성실하게 참여하며 생산적으로 채우려고 한다”며 “처음엔 강의 등을 들으며 문화예술을 배우지만 어느 순간이 지나면 배움과 삶이 괴리돼 있다는 생각에 한계를 느낀다. 삶을 스스로 재편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경험과 기회가 부족하다”고 분석했다.
이어 “지금의 신중년은 정책에서도 소외돼 있다”며 “새로운 무언가를 하는 걸 두려워하는 신중년에게는 일방적인 문화예술교육보다 이들이 살아온 경험을 잘 살릴 수 있는 커뮤니티 기반의 프로그램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중장년층을 위한 교육과 멘토링 서비스를 제공하는 ‘베테랑 소사이어티’를 운영하고 있다. 이 대표는 ‘신중년’에게 ‘소비하는 즐거움’과 ‘생산하는 즐거움’을 모두 제공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이 대표는 “신중년이 자신이 배운 것을 바탕으로 무언가를 생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면 자존감과 사회적 존재감을 회복하고 더 나아가 사회에도 많은 부분을 기여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또한 이 대표는 “신중년을 위한 정책과 프로그램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디지털 정보 격차 등으로 이러한 정책과 프로그램을 신중년이 제대로 파악하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라며 “일종의 ‘복덕방’처럼 신중년이 자신에게 필요한 프로그램을 찾을 수 있고, 또한 신중년이 가진 재능과 노하우를 활용할 수 있는 플랫폼이 있다면 좋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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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두희 베테랑소사이어티 대표는 ‘신중년’에게 ‘소비하는 즐거움’과 ‘생산하는 즐거움’을 모두 제공할 수 있는 선순환 구조가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사진=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
신중년에 대한 이 같은 교육과 정책은 사회적으로 긍정적인 파급 효과가 있다는 것이 이들 전문가의 생각이다. 윤 연구위원은 “문화예술교육을 통해 신중년은 적극적으로 여가를 즐기는 능동적인 주체로 사회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며 “개인에게는 행복 수명을 연장해주는 효과가 있고, 더 나아가 사회 전체를 보다 건강하게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배움을 통해 지식을 얻은 신중년이 자신의 배움을 사회로 전파하는 선순환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공동기획 : 문화체육관광부·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이데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