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그룹의 소재 계열사 롯데에너지머티리얼즈가 엔비디아가 주도하는 ‘인공지능(AI) 반도체’ 공급망에 진입했다. 데이터센터와 연결된 고성능 네트워크 장비(스위치)에 차세대 동박을 납품하는 것을 시작으로 향후 서버용 AI 가속기의 인쇄회로기판(PCB)에 들어가는 동박으로도 품목을 확대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전기차 배터리용으로 생산 중인 동박을 고효율, 저전력 제품으로 ‘업그레이드’하면서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롯데, AI 호황에 올라타나
롯데에너지머티리얼즈는 이달 초부터 ㈜두산 전자BG(비즈니스그룹)에 AI 가속기에 들어갈 초극저조도(HVLP) 4세대 동박을 공급한다고 17일 발표했다. 초극저조도는 열전도율을 높이기 위해 표면의 거칠기를 최소화했다는 의미다. 동박은 전류를 흐르게 하고, 열을 전달하는 전도체 역할을 하는 소재다. 배터리에선 리튬이온의 음극에 사용된다.
롯데 관계자는 “반도체용은 배터리용에 비해 더욱 정밀하고 균일한 두께를 요구한다”며 “HVLP 5·6세대 동박도 개발을 완료하고 고객사를 통해 제품 테스트를 진행 중”이라고 설명했다.
롯데가 공급하는 동박은 두산의 동박적층판(CCL·동박을 절연재와 결합해 만든 반제품 기판)에 들어간다. 업계 관계자는 “두산의 CCL을 공급받아 최종적으로 PCB를 제작할 곳이 어디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면서도 “엔비디아의 최신형 AI 가속기인 블랙웰로 이뤄진 데이터센터의 스위치용으로 납품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엔비디아는 글로벌 AI 반도체 시장을 석권한 절대 강자다. 더 많은 데이터를 열방출을 최소화하면서 빠르게 전달할 수 있는 AI 반도체를 만들려면 동박의 성능을 극대화하는 것이 필수다.
○배터리용 대비 단가 세 배 높아
롯데에너지머티리얼즈는 이번 공급을 계기로 전기차에 편중된 매출 구조를 AI 가속기용 등 고부가가치 제품 생산 체제로 바꾸겠다는 구상이다. 김연섭 롯데에너지머티리얼즈 대표(사진)는 이날 발표 자료에서 “AI 가속기 등 네트워크의 밸류체인을 공고히 해 핵심 공급사로 자리매김하겠다”고 말했다. HVLP 동박은 고속신호전송 효율에 따라 1세대에서 3세대로 나뉘는데, AI 가속기(블랙웰)용으로 사용되는 제품은 3세대 모델이다. 롯데에너지머티리얼즈는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4세대 동박을 생산하고 있다.
롯데는 2022년 일진머티리얼즈를 약 2조7000억원에 인수하며 동박 시장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전기차 수요가 감소하면서 올해 274억원의 적자를 낼 것으로 추정되는 등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평균 가동률은 2022년 97.5%에서 올해 1~3분기 71.8%로 줄었다. 전기차용 동박 시장은 특히 중국, 대만, 일본 등 공급사가 많아 가격 경쟁이 치열해 내년에도 이익을 내기 쉽지 않다.
롯데에너지머티리얼즈는 지난달 구축한 전북 익산공장의 AI 가속기 전용 생산라인(연 1800t)에서 제품을 공급하기 시작했다. 연 1800t을 모두 납품하면 수백억원 규모로 추정된다. 수만t 수준의 전기차용 동박(전지박)보다 규모가 작지만, 제품 단가는 AI 가속기용이 세 배 이상 비싸다. 앞으로 이 분야 생산이 늘어나면 실적 구조에도 변화가 예상된다. 롯데에너지머티리얼즈는 익산공장의 범용 동박라인도 AI 가속기용 라인으로 전환할 계획이다.
김형규/김우섭 기자 k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