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징후는 중고거래앱을 여는 횟수가 부쩍 줄어든 것이었어요. 주변 사람들에게 “왜 당근 안해요?” “운동기구라면 중고마켓 먼저 찾아봐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중고!”라며 떠들던 제가 어느 날은 조용히 ‘새벽배송’을 선택하고, 주말엔 중고거래에 올렸던 가죽점퍼를 슬쩍 재활용박스로 떠나보냈답니다. 중고거래를 위해 사진 찍고 판매글을 쓰는 수공예적 노동이 문득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이것이 권태인 것이죠.
봄비 내리던 밤, 오랜만에 중고거래 앱을 열어보고는 얼마나 놀랐는지요. 눅눅한 나의 권태기 동안 중고 유니버스에 전도유망한 인공지능(AI) 세상이 도래한 거예요. 이것은 마치 회사 막내였던 제게 처음으로 신입 후배가 다가와 “시키실 일 없나요?”라고 물었던 순간의 짜릿함! 그때처럼 후배의 진심을 살필 필요도 없죠. 나는 가장 못된 상사처럼, 아무렇게나 찍은 옷과 가방의 사진을 던져주면서 팔아오라고 명령만 하면 됩니다. AI가 내가 업로드한 사진을 ‘꼼꼼하게 살피는 중’이고 ‘열심히 쓰는 중’이라고 답한 뒤 10초도 되지 않아 판매글을 작성해 올려줍니다. 당근여사, 이렇게 될 줄 몰랐어? 전 문명 세계가 AI가 창조한 ‘사건의 지평선’으로 달려가고(또는 밀려가고) 있는데, 언제까지 당근 유니버스만 빈티지로 남아 글쓰고 거래하는 일을 인간이 계속하겠어? 당연해서 부끄러울 정도였어요.
“디올 미니 백, 양가죽 100%, 작은 소지품 넣기 좋아요. 2023년 구입. 금장 장식이 예뻐요. 사용감은 사진으로 확인하세요”이 AI는 사진에 ‘택(tag)’이 붙어 있으면 ‘새상품’이라고 쓰고, 나도 잊은 구입년도와 가격을 찾아옵니다. 모서리의 미세한 사용 흔적을 알아보고 ‘사용감은 사진으로 확인하라’는 설명까지 ‘굳이’ 덧붙이는군요. 디올의 금장 디테일이 아름답다는 정보를 검색한 것인지 ‘예쁘다’가 무난한 마케팅 용어라고 학습한 것인지 애매합니다만 어쨌든 이 신입, 꽤 똑똑합니다. 다림질이 귀찮아 중고거래 대신 재활용박스로 보내려던 새 블라우스는 다른 인공지능 비서가 매끈하게 다림질한 사진으로 바꿔주고요, 또다른 중고마켓 AI는 대충 찍은 사진들을 모아 올리면 동영상으로 만듭니다. ‘전신 착용 샷, 뒷모습 보내달라’는 성가신 거래자에게는 AI가 만든 사진을 보내줄 수도 있어요.
금쪽같은 휴일에 중고거래를 위해 세탁하고 예쁘게 사진을 찍고 소소한 사정을 밝히며 공손한 판매글을 쓰던 시대가 말 그대로 ‘라떼는’이 되었어요.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고개를 듭니다. 판매글과 사진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상대에 대한 통계적 신뢰도입니다. 한마디로 상대의 ‘인상’이죠. 우리는 직접 만나지 않아도 맞춤법, 말투, 줄임말의 사용, 구성과 이모지를 통해 상대를 파악하는 능력을 갖고 있거든요. 하지만 AI는 ‘찔러보기 금지’ ‘네고 사절’ 같은 상대를 멈칫하게 하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을 뿐아니라, 프로당근러의 상냥하고 교양있는 말투로 그럴듯한 서사를 지어냅니다. 조만간 중고거래 판매글은 광고문구처럼 상향평준화 될 것이고, 물품에 따라 가장 적절한 인격도 창조할 겁니다. 이제 거래 상대가 사람인지, 로봇인지 알 수 없게 된 거예요.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진짜 인간이 중고거래를 원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당근마켓에서 ‘인간다움’을 궁리하다니, 진짜 ‘멋진 신세계’가 아닌가요. 다행스럽게도 지금까지 AI가 상상한 ‘인간’이란 속이고 거짓말하는 존재가 아니라 이성적이고 선량하며 정직한 콘텐츠입니다. 즉, AI와 경쟁하려면 더 ‘좋은 인간’임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또는 ‘좋은 인간’이 되거나요. 내 디올백에 AI가 소개글을 쓰고, 나는 노련한 셰프처럼 ‘인간적인’ 풍미의 드레싱을 얹어 접시에 내놓습니다. 쉴 줄도 모르고 불평도 없는 신입 덕분에 연휴 내내 중고거래가 이어졌어요. 슬럼프를 과로로 이겨낸, 당근 여사입니다.@madame_carrot 당근, 고양이, 글쓰기를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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