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칸영화제] 제임스 그레이 ‘페이퍼 타이거’
프랑스 칸영화제는 세계 영화의 가장 뜨거운 현장이자 지금 이 순간 세계인이 열광하는 시네마의 준거점입니다. 제79회 칸영화제 현지에서 칸 황금종려상 후보인 ‘경쟁 부문(In Competition)’ 진출작과 관련한 소식을 밀도 있게 전해 드리겠습니다.
모든 사람은 자기 삶의 형체를 유지하려는 욕망 속에서 살아간다. 그러나 비극의 손이 슬쩍 우리를 누르기만 해도 삶이란 언제든 구겨지고 찢길 수 있는 것이다. 불운한 사고나 예측 못한 질병까진 아니더라도 삶에 틈입하는 작은 씨앗이 풍경을 망쳐버리는 일을 우리는 자주 목격했다. 올해 칸영화제 경쟁 부문(In Competition)에 진출해 황금종려상 후보로 거론되는 제임스 그레이의 영화 ‘페이퍼 타이거’는 ‘언제든 훼손될 수 있는 삶의 불안정성’을 질문하는 영화다. 17일(현지시간) 칸영화제 주행사장인 팔레 드 페스티벌(축제의 궁전) 뤼미에르 극장에서 영화 ‘페이퍼 타이거’를 살펴봤다.
때는 1986년, 뉴욕 퀸즈. 성실한 엔지니어이자 한 집안의 가장인 어윈이 주인공이다. 우애가 깊은 형 개리가 어윈을 찾아온다. 동생 집을 방문하면서 출장 뷔페를 주문하고, 수준 높은 피아노 실력을 지닌 개리는 언제나 위풍당당하며 세련된 남성이다.
개리가 찾아온 이유는 동생과의 동업을 위해서였다. 그는 기름 찌꺼기로 오염된 브루클린 운하 정화 사업을 계획 중이다. 이곳을 장악한 신흥 러시아 마피아 조직과 손을 잡아야 하는 부담이 있기는 해도, 돈벌이가 되는 확실한 사업이었다. 개리는 엔지니어인 동생 어윈의 도움이 필요했다. 형을 언제나 “미다스의 손”이라고 생각하는 어윈은 개리와 합심하기로 한다.
어윈은 아내 헤스터와 함께 두 아들의 대학 등록금을 걱정하는 처지였다. 그래서 이번 사업이 성공하면 앞으로 돈 걱정은 안 하고 살게 되리라고 믿었다. 한껏 고양된 어윈은 아빠의 신규 사업을 보여준다며 두 아들을 차에 태워 현장으로 향한다.
그런데 도착했을 때 이상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동업을 약속한 마피아 조직원들이 드럼통에 담긴 기름 찌꺼기를, 다시 강에 쏟아붓고 있던 것. 어윈의 갑작스러운 방문을 확인한 조직원들은 어윈을 폭행하고, 어윈의 두 아들을 날카로운 단도로 위협한다. 그리고 어윈의 신분증을 빼앗아 거주지까지 확인한다. “발설하지 않겠다”는 약속에도 조직원들은 자꾸만 어윈 주변을 맴돈다.
어윈은 미칠 지경이 된다. 조직원들이 언제 찾아올지 몰라서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침내 일이 벌어지고 만다. 2층 침실에서 자다 눈을 떠보니 1층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내려가 보니, 어윈 자신과 아내 헤스터, 그리고 두 아들이 ‘잠든’ 모습을 찍은 폴라로이드 사진이 탁자에 올려져 있었다. 그들이 잠든 사이에 집에 들어와 ‘경고장’을 날린 것이다. 어윈과 개리는 함정에 발을 잘못 들였음을 깨닫는다. 형제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이 대목에서 좀 더 설명하자면, 러시아 마피아가 기름 찌꺼기를 다시 강에 버린 이유는 그들이 공무원들과 이미 결탁한 관계였기 때문이다. 사업권을 따내 예산을 확보한 뒤 기름 찌꺼기를 처리하지 않고 그냥 쏟아부으면 예산만 건질 수 있었다. 개리와 어윈은 허수아비였다. 조직의 보스는 개리를 만나 “네 인맥을 활용해 경찰에 선을 대라”고 압박까지 한다. 아내 헤스터까지 6개월~1년 시한부 판정을 받으면서 어윈 가족의 삶은 그야말로 ‘난장판’이 된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이런 생각이 불가피해진다. ‘우리가 단단하다고 믿었던 모든 것들은 얼마나 허상인가.’ 삶의 형체는 자꾸만 무너지고 부서진다. 어윈과 헤스터와 개리의 평화는 ‘종이 호랑이’에 불과한 실체 없는 껍데기였고, 도시민을 보호할 뉴욕의 공권력도 역시 껍데기에 불과했음을 이 영화는 제목으로 은유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개리와 어윈 형제의 깊은 유대도 결국 껍데기에 불과했음이 영화 후반부에 나온다. 그들이 꿈꿨던 아메리칸 드림 역시 부패와 폭력 속에서 와해되며, 욕망을 품는 순간 그들 자신은 몰락한다. 개인도 세계도 결국 언제든 무너져도 이상할 것이 없다는 묘한 깨달음을 영화는 남긴다. 어떤 개인이든, 그게 누구든, 평온하게 살아갈 안전지대란 없는 것이다. 이곳에선 안락할 수 있다고, 이 세계는 나의 이익을 지켜줄 수 있다고 믿었던 세계는 시간이 흘러 다시 들여다 보면 언제나 벼랑 끝이다. 그러나 습자지처럼 얇은 종이 한 장의 삶을 지키기 위해선, 우리의 모든 인생이 필요하다.
이 영화에는 동생 어윈 역의 마일스 텔러, 형 개리 역의 아담 드라이버, 어윈의 아내 헤스터 역의 스칼렛 요한슨이 참여했다. 흥미롭게도 노아 바움벡의 2019년 영화 ‘결혼 이야기’에서 부부 배역을 맡았던 아담 드라이버와 스칼렛 요한슨은, 이번 영화에서 7년 만에 시아주버니와 제수 사이로 만났다. 스칼렛 요한슨의 흥미로운 헤어타일도 눈길이 간다. 이날 열린 ‘페이퍼 타이거’ 월드 프리미어 상영에는 스칼렛 요한슨이 촬영 문제로 참석하지 못했는데, 제임스 그레이 감독이 기립박수가 터지자 이 모습을 보여주려고 스칼렛 요한슨에게 영상 통화를 시도했으나 음성사서함으로 넘어가 버렸다. 그 모습을 2300여명의 관객들이 지켜보고 폭소를 터뜨리면서 외신에 소개되기도 했다. 다음날 기자회견에서 제임스 그레이 감독이 밝힌 바에 따르면 스칼렛 요한슨은 그 시각에 뉴욕에서촬영 중이었다고 전해진다.
‘페이퍼 타이거’의 수상 결과는 24일 새벽(한국시간) 발표된다. 스크린데일리 그리드 평점에서 ‘페이퍼 타이거’는 2.8점으로 나홍진 감독의 ‘호프’와 공동 3위를 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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