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족의 “2차 가해” 진정은 기각
학교측은 “트라우마 고려한 조치”
전문가 “졸업앨범서 삭제는 은폐, 유족과 추모 논의후 결정했어야”

2024년 2월 부산의 한 초등학교 강당. 40대 강모 씨는 딸의 얼굴이 담긴 액자를 품에 안고 연단에 서서 이렇게 외쳤다. 교장은 졸업생을 한 명씩 불러 졸업장을 전달하고 악수했지만, 다른 반으로 넘어갈 때까지 딸의 이름은 불리지 않았다. 속상한 마음에 강 씨는 무작정 연단에 올랐다고 한다. 강 씨는 “딸과 내가 유령이 된 것 같았다”고 했다.
강당을 나올 때 한 교사가 “조 양을 위해 특별히 제작했습니다”라며 졸업앨범을 건넸다. 이상한 낌새를 느낀 강 씨가 다른 학생 앨범에도 딸 사진이 있는지 묻자 교사는 “이해해 주셔야죠”라고 답했다고 한다.
● “흔적 지운 2차 가해” vs “트라우마 고려”친구들의 따돌림을 호소하다가 숨진 조 양(당시 12세)의 사진이 동급생 60여 명에게 배포된 졸업앨범에서는 삭제되고 유족에게는 조 양의 사진이 포함된 별도의 앨범이 제공된 것. 다른 졸업생들에게 전달된 졸업앨범에는 조 양의 얼굴 사진이 공란 처리됐고, 단체 사진에서는 지워진 상태였다. 학교 측은 학생들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우려한 조처였다는 입장이지만, 유족은 고인의 존엄이 충분히 보장되지 않았다고 항의했다.
조 양은 졸업 4개월여 전인 2023년 10월 부산의 한 아파트에서 숨졌다. 강 씨는 “딸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친구 포즈를 따라 했다는 이유 등으로 따돌림을 당하다가 숨졌다”고 주장했다.
이후 학교폭력대책심의위원회가 열리고 경찰 조사가 이뤄졌으나 학교폭력으로는 인정되지 않았다. 부산시교육청 행정심판위원회가 재조사를 결정했으나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강 씨는 “딸의 사진을 앨범에서 삭제한 학교의 결정은 학교폭력 의혹 관련자의 흔적을 지우는 2차 가해”라며 지난해 국가인권위원회에 인권 침해 진정을 냈다. 약 1년의 검토 끝에 인권위는 지난달 진정을 기각했다. “별도로 피해자 사진을 포함한 졸업앨범을 제작해 전달한 사실 등을 고려하면 권리를 침해할 정도에 이르렀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이유에서다.다만 인권위는 결정문에 학교 대응을 지적하는 3장 분량의 ‘검토의견’을 담았다. 인권위는 “졸업앨범은 공식 기록물이자 학생의 추억을 담는 상징적 자료”라며 “피해자를 건강하게 애도하고 기억하는 방향으로 지원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또 “앨범을 별도로 제작해 전달하는 과정에서 피해자를 잃은 진정인에게 사전에 설명하는 과정도 없었다”고 덧붙였다.
학교는 인권위 조사 과정에서 ‘(다른) 학생의 트라우마를 유발할 수 있다는 외부 기관 자문과 내부 회의를 거쳐 결정한 사안’이라고 설명했지만, 자문 관련 자료는 제출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학교 측은 앨범 제작 경위 등을 묻는 질문에 “드릴 말씀이 없다”고만 했다.
● “늘어나는 학생 사망, ‘애도 지침’ 필요”
이번 사건은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학생을 주변에서 애도하는 방식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맞닿아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인권위도 “학교에서 한 사람의 존재를 어떻게 기록하고 기억하느냐는 것은 공동체의 가치와 윤리관을 드러낸다”고 했다. 이어 부산시교육감에게도 “사망 학생 추모와 기록 처리에 관한 세부 지침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이에 대해 부산시교육청 인성체육급식과 관계자는 “(숨진 학생을) 졸업앨범에 넣을지 등에 관한 지침은 없다”며 “원칙적으로 유족 의견을 들어 결정하는 것이 맞지만, 이번엔 의견 수렴이 충분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사망 학생을 애도하는 방식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정구 해운대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지우는 방식은 문제 해결이 아니라 은폐에 가깝다”며 “유족과 충분히 논의해 추모 방식과 사진 등재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고 했다. 김현수 명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도 “미국 등에선 학생 사망 시 학교 공동체가 함께 애도하는 것이 보편화돼 있다”며 “사망의 방식과 무관하게 충분한 애도 기회를 보장해야 오히려 학생들의 트라우마를 줄일 수 있다”고 조언했다.
부산=김화영 기자 ru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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