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계엄이 만든 '블랙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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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어린이 잡지에서 '블랙홀'에 대한 글을 처음 읽고 엄청난 두려움에 사로잡혔던 적이 있다. 과학적 배경지식이 없는 소년에게 블랙홀은 주변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무시무시한 존재였다. 당시 블랙홀이 우주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면서 점점 커지고, 결국엔 지구까지 빨아들이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있었다. 성인이 된 지금 블랙홀에 대한 공포는 어린 시절의 재미있는 기억 정도로 남아 있다.

우리는 일상에서 무언가를 빨아들이거나 흡수하는 큰 현상을 블랙홀에 비유한다. 지금 대한민국은 '비상계엄'과 이로 인해 불거진 '탄핵 사태'가 커다란 블랙홀이 됐다. 정치는 물론이고 경제, 사회, 산업, 외교, 문화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분야가 계엄과 탄핵이라는 블랙홀에 빠져 있다.

지난 12월 3일 윤석열 대통령이 기습적으로 발표한 비상계엄과 6시간 만의 비상계엄 해제. 계엄해제 직후부터 터져 나온 윤 대통령 탄핵 요구.

계엄 선포 이후 탄핵 사태를 거치면서 국내 주식시장은 요동쳤고, 외국인 투자자는 서둘러 발을 빼고 있다. 증시 폭락으로 상장을 준비하던 기업들도 패닉이다. 수년간 착실하게 상장을 준비해왔는데, 현재 시장 분위기에서는 제대로 평가받기 어려울 것으로 전망되기 때문이다.

대외적인 국가 신인도도 추락했다. 글로벌 신용평가기관 피치는 보고서에서 “계엄 선포에 따른 정치적 불확실성이 국가 신뢰도에 잠재적인 위험을 초래한다”고 지적했다. 다른 신용평가기관들도 국내 정치 상황을 주의 깊에 바라보고 있어 향후 평가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우려가 크다.

비상계엄 발표 직후에는 일부이긴 하지만 외국에서 원화 환전을 중단하는 사태도 발생했다. 한국 여행이나 방문 자제를 권고하는 나라도 나왔다.

산업계도 대혼란이다. 환율 급등과 경제 불확실성 고조 등이 사업에 미칠 영향을 분석하고, 이에 맞춰 향후 사업계획을 수정하느라 분주하다.

무엇보다 국민 일상에 큰 파장을 미쳤다. 40여년 전 마지막 계엄 당시를 기억하는 세대는 이번 계엄 선포로 잊고 있던 과거의 공포를 떠올렸다. 계엄을 경험하지 못한 젊은 세대는 책 또는 미디어를 통해서만 접했던 일을 직접 목격하며 충격에 빠졌다. 국회에 무장한 군인이 난입하고, 선거관리위원회와 민간 시설에도 군인들이 들이닥쳤다. 다행히 큰 충돌 없이 계엄이 해제됐지만, 평화롭고 안전한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소시민들은 비상계엄으로 일상이 무너질 수 있음을 경험했다.

가장 놀라운 것은 이 사태를 촉발한 사람이 국가 안위를 지키고, 국민 안전을 책임져야 할 국가 최고 책임자인 대통령이라는 점이다. 이번에 대통령이 발동한 계엄은 법적 요건을 갖추지 못함은 물론이고, 국민이 납득할 만한 어떠한 당위도 없었다.

이제 필요한 것은 대한민국을 집어삼킨 블랙홀을 서둘러 없애는 것이다. 우주의 블랙홀이 소멸하는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계엄과 탄핵사태가 만든 블랙홀 소멸은 얼마든지 앞당길 수 있다. 문제를 법과 원칙에 따라 신속하게 처리하면 된다.

국민이 원하는 것은 명료하다. 이번 사태와 관련해 그 누구든 책임이 있다면 책임지고, 잘못이 있다면 처벌받으라는 것이다. 이것이 블랙홀을 소멸시키고, 혼란을 수습하는 가장 빠른 길이다.

권건호 기자 wingh1@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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