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기업인의 마음속에 체증처럼 박혀 있는 단어는 아마 인공지능(AI)일 것이다. 정부는 AI에 100조원을 쏟아붓겠다고 공언하고, 언론은 온통 AI가 창출할 미래와 글로벌 기업들의 천문학적 투자 얘기로 도배돼 있으니 ‘혹시 나만 뒤처지는 것 아닌가’ 하는 불안이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일종의 ‘포모(FOMO) 증후군’이다. 이쯤 되면 인공지능 전환(AX)에 성공한 기업이 속속 등장해야 할 텐데 꼭 그렇지만은 않다. AX 상품을 기업에 팔고, 조언하는 것으로 돈을 버는 컨설턴트들은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게 없는 상황”이라고 말한다. 최고경영자(CEO)들의 답변은 거의 똑같다. “성공 사례를 가져와 봐라. 우리 기업이 실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AI 시대 노동시장 급변
미국 인구조사국의 올 2분기 자료에 따르면 120만 개 기업 중 생성형 AI를 제품이나 서비스 생산에 활용하는 곳은 9%를 웃돈다. 이 비율은 지금도 빠르게 상승 중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IBM 인사관리(HR) 조직이 현재 투입 중인 인력은 4년 전과 비교해 40%가량 줄어들었다고 한다.
‘AI 에이전트’의 등장은 기업의 생산성 향상과 일자리의 변화에 불을 댕기고 있다. 회사 재무 현황과 산업 환경을 학습한 AI가 재무팀 똘똘한 과장쯤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게 빅테크들의 장밋빛 전망이다. ‘업무 보조’를 넘어 ‘업무 대체’로 AI 활용처가 넓어지면 생산성 측면에서 얘기가 달라진다. 인건비를 줄일 수 있는 데다 업무 정확성도 훨씬 높아질 개연성이 크다. 빅테크들이 AI 에이전트 시장에 앞다퉈 뛰어들면서 ‘의인화된 AI’는 영화 아이언맨의 자비스가 꿈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레이 커즈와일 같은 미래학자는 인류와 AI의 결합을 통해 마침내 특이점이 시작됐다고 갈파했다. 섭씨 100도에서 물이 기체로 바뀌듯 ‘상(相)의 변이’다. AI는 19세기의 철도이며, 20세기의 인터넷이다. 우리의 일상을 바꾸고, 기업의 경쟁력을 송두리째 바꿀 것이다. 변화의 실태를 좀 더 쉽게 이해하는 데 제프리 힌턴 캐나다 토론토대 교수의 비관 섞인 전망이 도움이 될 것이다. 딥러닝의 실용성을 전 세계에 입증하면서 구글 등 빅테크가 AI에 천문학적 돈을 쏟게 만든 힌턴은 이렇게 말했다. “처음엔 진실이, 그다음엔 직업이, 최종적으론 인류가 사라질 것”이라고 말이다. 그의 디스토피아적 예언은 비록 과장되긴 했지만 무엇에 대처해야 할지에 관한 명확한 직설이다.
정부는 무지하거나 방관
하지만 한국 기업은 이 지점에서 강력한 장애물을 만난다. AI가 대체한 재무팀 대리와 과장은 어디로 보내야 하나. 인사, 총무, 영업 부서도 AI 도입으로 사람을 줄일 수밖에 없다는데 대체 이 많은 유휴 인력을 어떻게 한다는 말인가. 마이크로소프트 등 미국 빅테크들은 초급 엔지니어들을 학살에 가까운 수준으로 대량 해고하고 있지만 저성과자 해고도 불가능한 한국에선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해외에 공장을 지으려면 노조 동의를 받으라는 노란봉투법은 향후 AI 도입이 고용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끼친다면 노조 동의를 받으라는 식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높다. 안 하자니 해외 경쟁자에 뒤처지고, 하자니 노조의 위세에 눌릴 수밖에 없는 딜레마적 상황이다. AI 시대 고용노동부를 맡은 김영훈 장관이 직을 걸어야 할 건 노동 존중만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