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江湖(강호)애 病(병)이 깁퍼 竹林(듁님)의 누엇더니…"
송강 정철은 <관동별곡> 첫머리에서 자연을 죽림(대나무숲)이라 했다. 중국 위·진 교체기의 정쟁을 피해 대나무 숲으로 숨어들어 거문고와 술을 즐겼던 '죽림칠현(竹林七賢)'에게도 대나무 숲은 유가적 질서의 위선을 폭로하고 노장사상을 신봉하던 자연이었다. 역사와 문학 속에서 대나무 숲은 늘 번잡한 세상을 벗어난 자연은 사유와 치유의 공간으로 상징돼 왔다.
지난 15일부터 17일까지 서울 세종문화회관에 오른 서울시발레단의 컨템퍼러리 전막 창작 발레 '인 더 뱀부 포레스트(In the Bamboo Forest·강효형 안무)'는 이 익숙하고도 깊은 동아시아적 클리셰를 현대적인 몸짓으로 재해석하며 관객에게 깊은 울림을 선사했다.
○대나무 숲, 치유와 사유의 공간으로 변모하다
작품이 주목한 것은 대나무 숲이 가진 '비움'과 '회복'의 힘이었다. 작품은 혼란과 고난 속에서 번민하던 한 인물이 대나무 숲에 들어서며 쓰러지는 것으로 시작된다.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 속 화자가 자연 안에 몸을 뉘이는 모습이 연상됐다.
인물은 총 여섯 장으로 구성된 무대를 거치며 대나무 숲과 호흡하고 사유한다. 공간을 유영하듯 떠다니는 무용수들 사이에서 주인공은 내면의 질서를 회복해 나가고 마침내 차오른 에너지를 바탕으로 스스로 몸을 일으켜 세운다. 치유의 여정이 완성되는 순간이다.
○클래식과 현대무용, 한국무용의 ‘뜨거운 충돌과 해체’
이번 공연의 가장 신선한 볼거리는 단연 장르의 경계를 허문 안무 기법이었다. 무용수들은 포인트슈즈를 신은 네오클래식적인 몸짓으로 시작해, 이내 슈즈를 벗어던지고 현대적인 움직임과 한국무용의 호흡을 조합해 대나무숲의 이미지를 다양한 동작으로 표현해냈다.
리드 무용수의 부상으로 갑작스레 이 역할을 맡게된 발레리나 최목린도 죽순처럼 자신의 역량을 쭉쭉 펼쳐나갔다. 발레리노 엄진솔은 남성 군무를 이끌며 뿌리내리기라는 혹독한 성장의 서사를 무대에서 보여줬는데, 이는 국립발레단을 나와 서울시발레단의 시즌무용수의 길을 택한 모험형 서사와도 맞물려 더욱 돋보였다.
이밖에도 여러 장르의 춤이 한 무대에서 뜨겁게 충돌하고 비틀어지는 과정은 그 자체로 역동적이었으며 주된 배경음악인 거문고 선율과 어우러졌다. 마치 팽팽한 거문고 줄처럼 움직이는 신체는 시각적 긴장감을 지속적으로 안겼다. 시종일관 위로 떠 있는 듯한 '풀업(Pull-up)' 자세를 유지해야 하는 고전 발레의 문법을 과감히 깨뜨린 점은 그래서 더 돋보였다.
서울시발레단 무용수들은 풀업 상태를 유지하다가도, 현악기의 줄이 탁 끊어지듯 무게중심을 툭 내려앉히는 동작을 여러 차례 선보였다. 상하를 유연하게 오가는 무게중심의 이동이 그토록 자유로워 보일 수 있었던 건 대나무 만큼이나 강직한 무용수들의 코어에 있었다.
○객석으로 번진 '숨', 흉곽에 갇힌 현대인의 호흡을 깨우다
작품의 정점은 무대와 객석이 하나로 공명하는 호흡에 있었다. 무용수들은 무대 위에서 종종 크게 숨을 터뜨리듯 내뱉는데, 이 소리는 극장 전체로 퍼져나가 관객들의 숨통을 틔웠다.
늘 긴장한 채 흉곽에 겨우 머물듯 말듯 가쁘고 얕은 숨을 내쉬며 살아가던 관객들은, 무용수의 날숨을 따라 비로소 크게 숨을 내쉬기 시작했다. 무대 위의 호흡에 객석이 공명하는 이 경이로운 모션만으로도 극장은 이미 거대한 치유의 대나무 숲 그 자체가 됐다.
'인 더 뱀부 포레스트'는 동양적 정서만 차용한 발레는 아니었다. 무용수들의 신체 감각과 호흡을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을 위한 위로의 몸짓으로 녹인 노력이 돋보였기 때문이다. 서울시발레단이 지향하는 창작 발레의 방향성이 가장 감각적으로 빛났던 작품이다.
이해원 기자 umi@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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