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함은 상상력을 말하는 겁니다.”(‘신의 카르테 0’, 나쓰카와 소스케 지음, 백지은 역, arte, 2018년)
가끔 일본 TV 드라마를 본다. 주로 미스터리물을 보는데, 한국에서라면 만들 엄두를 못 낼 가볍고 잔잔한 소재를 버무린 작품도 시청한다. 배우들 연기가 연극을 하는 듯해서 낯설지만 ‘신선한데…’ 하는 경우도 있다. 에피소드마다 소소하든 묵중하든 교훈을 담으려 애쓴다는 점이 흥미롭다. 어떨 때는 강박인가 싶어 징그럽고 어떨 때는 너무 전형적이어서 실소가 새 나오지만, 눈시울을 찔끔하는 순간이 꽤 있다.
짧은 일화를 통해 삶에 필요한 혹은 필요할 법한 지혜나 윤리, 통찰을 전하는 이야기 형식은 이솝우화(寓話)나 탈무드처럼 아주 오래됐다. 한국보다 시장이 큰 일본 장르 소설, 대중소설도 이 같은 양식을 취하는 글이 적지 않은 것 같다. 심심풀이 삼아 읽다가 흐트러진 자세를 순간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되는 대목을 맞닥뜨린다. 그런 소설들이 드라마로 많이 각색된다.
최근 읽은 ‘신의 카르테 0’도 드라마로 방영된 소설의 프리퀄(prequel·원래 작품 내용보다 앞선 시기 이야기를 다루는 속편) 격이다. 지방 종합병원 의사 이야기를 다루는 이 소설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온다. “다정함은 상상력을 말하는 겁니다.” 다소 뜬금없는 듯한데 그 앞부분을 읽으면 좀 이해가 된다. “다정함은 약함이 아닙니다. 상대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를 생각하는 힘을 다정함이라고 말하는 겁니다.”다정(多情)함이 사전적 정의(定意)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정을 많이 베푸는 것이라면, 정이란 무엇인가. 이 소설을 쓴 이는 상대의 생각을 헤아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려면 필요한 역량이 상상력이라는 얘기다. 상상력은 자기 머릿속 공상이나 예단(豫斷)이 아니라 상대에 대한 깊은 이해에서 비롯된다. 상대가 처한 상황과 개선될 수 있는 미래를 숙려(熟慮)하고 이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또는 해야 할 바를 구상해 실천하는 것이 다정함의 완성일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다정함은 자기 잇속만, 자기 미래만, 자기 영달(榮達)만 생각하지 않는 것에서부터 시작할 터이다. 상대의 범위도 한 사람에서, 한 집단으로, 한 종족으로, 한 민족으로, 한 국가로, 온 인류로 뻗어 나갈 수 있다. 답답한 한국 상황에서 정치하는 사람들이 가장 가졌으면 하는 능력이 다정함이라고 생각한다.
대통령 탄핵은 개개인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다. 탄핵 찬성이든 반대든 그것을 위해서 자식의 대학 입시 정시 합격을 포기할 수 있나, 자신의 승진을 미루겠는가. 보따리 시간강사가 대학 강의 자리를 내놓을 수 있을 것인가, 직원 월급 미루지 않기에도 허덕이는 작은 기업이 막중한 계약을 미뤄도 괜찮은 것인가. 아니지 않나. ‘나무판자에 숨죽여 흐느끼며 남몰래 쓴다’고 할만한 가치도 아니다. 그런 시대도 아니다.
나라를 다스린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지금은 다정해야 할 때다. 유권자와 국민과 민족과 나라가 인류가 ‘생각하는’ 것을 생각하는 힘을 길러야 한다. 계산은 그다음에 해도 늦지 않을 것 같다. ‘다정(多情)도 병인 양하여 잠 못 드는’ 정치인이 많아졌으면 하는 섣달이다.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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