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대신 모델을 서 줄 수 있을까?”
캔버스 앞에 서 있던 아내가 말했습니다. 화가인 그녀는 오늘 오기로 약속했던 그림 모델이 못 온다는 연락을 방금 받은 참이었지요. 남편은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무슨 소리야, 당신 그림에는 여자가 나오잖아.” 하지만 아내는 진지했습니다. “아니야, 당신은 다리가 가늘고 예뻐. 생김새도 여성스럽고. 자, 여기 와서 스타킹 좀 신어봐.” 말을 마친 아내는 다짜고짜 스타킹과 하이힐을 가져와 남편에게 신겼습니다. 남편은 조금 당황했지만, 아내가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그래, 당신 작업에 도움이 된다면야.”
그렇게 시작된 작업은 잘 풀렸습니다. 아내는 장난스레 말했습니다. “진짜 모델 못지않은데? 모델 한번 해봐. 이름은 릴리라고 하는 건 어때?” “하하, 그게 무슨 소리야. 이상한 말 하지 마.” 남편은 쑥스러운 듯 웃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서는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이상한 감정이 조용히 피어오르고 있었습니다. 여자 옷을 입은 몸이, 스타킹의 감촉이, 하이힐의 아찔함이... 왠지 모르게 편안했거든요. 마치 오랫동안 떠나 있었던 제자리로 돌아온 것처럼.
20여년이 흐른 뒤, 남편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성전환수술을 받은 트랜스젠더로 기록됩니다. 그리고 얼마 안 돼 수술의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그 세월 동안 두 사람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덴마크의 화가 게르다 베게너(1885~1940)와 그의 남편인 에이나르 베게너(1882~1931), 그리고 릴리 엘베. 세 사람의 이야기를 지금 시작합니다.
젊은 화가들, 사랑에 빠지다
두 사람이 만난 건 아내인 게르다가 열일곱 살, 남편인 에이나르가 스무 살이던 1902년이었습니다. 중산층 집안에서 태어나 예술가의 꿈을 안고 코펜하겐에 유학을 온 두 사람은 덴마크 왕립 미술학교에서 서로를 보자마자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2년간의 연애 후 둘은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당시 기준으로도 꽤 이른 나이에 결혼할 수 있었던 건, 두 사람이 먹고사는 데 걱정이 없을 정도로 유망한 화가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남편인 에이나르는 일찌감치 풍경화로 덴마크 미술계에서 이름을 날렸습니다. 아내인 게르다도 실력을 인정받는 화가였습니다. 1907년 스물두 살의 나이로 덴마크 일간지가 주최한 미술대회에서 최고상을 받기도 했지요. 게르다가 그린 ‘엘렌 폰 콜의 초상’은 덴마크 미술계에서 큰 화제를 모았습니다. “잘 그리긴 했는데, 그림 분위기가 너무 퇴폐적인 거 아니냐”는 비판이 나올 정도로요.
‘이게 뭐가 퇴폐적이야. 덴마크는 역시 너무 촌스러워.’ 게르다 부부는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유럽 여행을 떠났습니다. 두 사람이 이때까지 각종 미술상을 휩쓸며 상금을 받은 덕분에 돈은 충분했습니다. 덴마크를 떠난 부부는 이탈리아와 영국을 거쳐 프랑스 파리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살 곳은 바로 여기야.’
1912년, 두 사람은 파리에 정착해 화가로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덴마크에서는 에이나르가 더 훌륭한 화가로 인정받았지만 파리에서는 게르다의 인기가 남편을 앞질렀습니다. 파리 시민들의 입맛에 맞는 세련되면서도 독특한 스타일 덕분이었습니다. 부자들은 앞다퉈 게르다의 그림을 사들였습니다. 그녀의 그림은 각종 광고와 신문을 장식했습니다.
에이나르는 게르다를 적극적으로 도왔습니다. 그는 자기 작업까지 그만두고 아내의 활동을 도왔습니다. 작품 판매와 일정 조율을 돕는 매니저 역할도 자처했습니다. 그 모습에 게르다는 깊은 고마움을 느꼈습니다.
신비로운 모델, 릴리
이 무렵 게르다의 작품에는 한 여성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세련된 짧은 단발머리에 도톰한 입술, 아몬드 모양의 매혹적인 갈색 눈을 가진 신비로운 미녀였지요. 그 여성의 정체는 바로 여장을 한 게르다의 남편, 에이나르였습니다.
시작은 우연한 장난이었습니다. 게르다의 화실에 올 예정이었던 그림 모델이 사고로 약속을 취소하자, 게르다가 에이나르에게 “여장을 하고 모델을 서달라”고 부탁한 게 발단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에이나르는 여성스러운 외모의 소유자였습니다. 길거리에서 남성복을 사다가 “여자가 왜 남자 옷을 사느냐”고 오해를 받은 적이 있을 정도였지요. 처음에는 거부했지만 막상 여장을 하자 에이나르는 편안함을 느꼈습니다. “이상하지만 여장은 처음부터 즐거웠습니다. 아주 편안한 기분이었고, 부드러운 여성복의 촉감이 좋았어요.” 훗날 그는 회고했습니다.
그리고 에이나르는 점점 여장 취미에 빠져들었습니다. 게르다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은 에이나르의 여장을 이상하게 여기기는커녕 ‘릴리 엘베’라는 예명까지 붙여 줬습니다. 게르다는 여장한 에이나르와 함께 파리 시내를 돌아다니곤 했습니다. 사람들이 “옆에 있는 사람은 누구냐”고 물으면 게르다는 답했습니다. “제 사촌 언니, 릴리예요.”
게르다는 왜 에이나르의 여장 취미를 말리지 않았을까요. 먼저 당시 파리의 분위기가 아주 자유로웠다는 점을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특히 제1차 세계대전(1914~1918) 이후 파리는 전에 없을 만큼 자유분방했습니다. 전쟁의 트라우마로 언제든 삶이 끝날 수 있다는 사실을 체감한 유럽 사람들이 ‘지금 나는 살아있다’는 사실을 느끼려 했거든요. 사람들은 이전보다 훨씬 더 자기 욕망에 충실했고, 사회는 이전에 허용되지 않았던 것들을 관대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여장도 그런 것들 중 하나였습니다. 게르다가 그리는 미녀 모델이 남편인 에이나르였다는 걸 알게 된 파리 시민들은 깜짝 놀랐지만, 이내 그 사실을 받아들였습니다.
또 하나는 게르다가 에이나르의 모든 것을 사랑했다는 점입니다. 에이나르는 오랫동안 게르다를 위해 자기 경력과 삶을 희생하고 있었습니다. ‘이번엔 내가 그를 받아줄 차례야.’ 게르다는 생각했습니다. 게다가 그녀는 남편과 자매처럼 다니는 게 색다르고 즐겁다고 느꼈습니다. 마지막으로, 릴리는 탁월한 모델이었습니다. 릴리의 중성적인 매력, 자신의 새로운 정체성을 탐험하고 발견해나가는 주체적인 과정은 게르다가 그리고 싶은 여성상과 딱 맞아떨어졌습니다.
두 사람은 한동안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게르다는 1925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여러 상을 받으며 당시 유행했던 미술사조 ‘아르데코’의 대표 주자로 인정받았습니다. 유명 일러스트레이터로 일하며 잡지에 그림을 그렸고, 미술책을 내며 경제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뒀지요. 게르다의 작업실인 파리의 값비싼 스튜디오에서는 화려한 파티가 자주 열렸습니다. 그 파티에는 릴리, 즉 여장한 남편(에이나르)이 늘 함께했습니다. 두 사람의 관계는 단순한 화가와 모델을 넘어 서로의 예술과 삶을 완성시켜 주는 공동의 창작자였습니다.
에이나르, 릴리로 죽다
하지만 그동안 에이나르의 마음속에서는 두 개의 정체성이 서로 격렬하게 싸우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남자, 즉 에이나르로 있을 때 우울증과 기침에 시달린다는 사실을 알아챘습니다. “남자 옷을 입었을 때 나는 숨 막히는 옷을 입도록 강요받은 느낌이었고, 내 모습이 우스꽝스럽다고 느꼈다.” 반면 릴리로 있을 때 그는 밝고 행복했습니다.
에이나르는 자기 마음속의 릴리를 억누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릴리는 점점 에이나르보다 강해졌습니다. 40대 후반이던 1930년, 에이나르는 이렇게 썼습니다. “릴리는 매일 격렬하게 반항하고 있다. 나는 이제 끝났다. 릴리가 이길 것이다.” 그렇게 에이나르는, 릴리가 되었습니다.
그 해, 릴리는 인류 최초의 현대적 성전환수술을 받기로 했습니다. 게르다는 그 사실에 힘들어했습니다. “내가 에이나르에게 처음으로 여장을 시킨 탓에 그가 성전환수술을 결심한 것 같아서 괴로운 마음이 들 때가 있다.” 사실 이미 두 사람은 부부라고 보기 어려운 관계였습니다. 게르다도 남성을 좋아했고, 여성이 된 릴리도 남성을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게르다는 릴리의 새로운 삶을 응원해주기로 했습니다. 그림을 팔아 릴리의 성전환수술 비용도 대줬습니다. 게르다에게 릴리는 자매이자 가장 친한 친구였으니까요.
마침내 릴리는 성전환수술을 감행했습니다. 그 후 호적 정정 신청을 한 끝에 법적으로 여성이 됐습니다. 당시 덴마크 법은 동성 결혼을 인정하지 않았기에, 게르다와 릴리의 결혼은 무효화됐습니다. 두 사람은 각각 다른 남자를 만나고 있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둘의 우정은 계속됐습니다. 게르다는 릴리가 받아야 했던 4~5번의 추가 수술 비용을 계속 내줬습니다.
릴리의 마지막 꿈은 엄마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자궁을 이식한다고 해도 릴리가 임신할 수는 없고, 면역 체계만 엉망이 돼 죽음에 이를 뿐입니다. 당시 사람들도 어렴풋하게나마 그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릴리는 실낱 같은 희망에 자신의 인생을 걸어보기로 했습니다. 게르다가 반대할 게 뻔하기에, 릴리는 게르다 몰래 돈을 마련했습니다. 그리고 1931년 자궁 이식 수술을 받은 릴리는 이틀 후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의 나이 마흔아홉이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릴리는 행복했습니다.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 친구에게 보낸 편지가 그 증거입니다. “나는 릴리로 1년 남짓 살았어. 짧다고 할 수 있는 기간이지만, 마침내 온전하고 행복하게 ‘나’로 살 수 있는 시간이었어.” 릴리의 소식을 들은 게르다는 크게 상심했다고 합니다.
좋았던 시절은 가고
이후 게르다의 삶도 내리막을 걸었습니다. 게르다는 열한 살 연하의 이탈리아 군인과 재혼해 모로코로 떠났습니다. 하지만 결혼 생활은 불행했고, 남편은 그녀의 재산을 탕진했습니다. 결국 1939년 이혼한 그녀는 빈털터리가 돼 덴마크로 돌아왔습니다.
현실은 냉혹했습니다. 한때 파리를 넘어 전 유럽을 매혹했던 그녀의 화려한 스타일은 이제 낡은 유행 취급을 받았고, 사람들은 그녀를 잊은 지 오래였습니다. 게르다는 손으로 그린 엽서를 팔았고, 그 돈으로 술을 사서 마셨습니다. 그러다 건강이 악화된 그녀는 1940년 쉰다섯의 나이로 홀로 쓸쓸하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신문에는 게르다의 부고가 짤막하게 한 줄 실렸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습니다. 릴리가 썼던 자서전은 1950년대 미국에서 출판돼 화제를 모았고, 훗날 트랜스젠더를 비롯한 성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이들에게 널리 읽혔습니다.
게르다의 재조명은 좀 더 늦었습니다. 그녀를 기억하는 본격적인 전시가 열리기 시작한 건 1990년대 들어서였습니다. 2000년 그녀를 조명하는 소설 ‘대니시 걸’이 출간돼 인기를 끌었고, 2015년에는 게르다 부부의 이야기를 다룬 같은 제목의 영화가 나와 호평을 받았습니다(국내에도 개봉됐습니다). 오늘날 게르다는 여러 사회적 한계를 뚫고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한 강인한 여성 예술가로 평가받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 생물학적 한계마저 뛰어넘으려던 릴리는 혹독한 대가를 치렀습니다. 게르다의 최후 역시 쓸쓸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진정한 나’로 있고자 했던 릴리의 의지, 릴리를 지지해 준 게르다의 변치 않는 마음은 확실히 인상적입니다.
만약 사랑하는 사람이 어제와 다른 존재가 되기를 꿈꾼다면, 우리는 어디까지 그를 이해하고 함께 걸어갈 수 있을까요. 게르다는 끝까지 릴리의 손을 잡아 주었습니다. 서로가 있었기에 두 사람은 짧게나마 가장 자기다운 모습으로 빛났고, 기꺼이 그 대가를 치렀습니다. 게르다의 그림 속 화려한 옷과 몽환적인 시선의 여성들은 그 덧없지만 찬란했던 시간이 한때 세상에 존재했음을 증언합니다.
행복한 명절 보내세요.
**이번 칼럼은 Gerda Wegener(ARKEN 미술관 전시도록), 'Man into Woman'(릴리 엘베 지음) 등을 참조해 작성했습니다.
<그때 그 사람들>은 미술 담당 기자가 미술사의 거장들과 고고학, 역사 등을 심도 있게 조명하는 국내 문화 분야 구독자 1위 연재물입니다. 매주 토요일 새로운 이야기로 찾아옵니다. 네이버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미술 소식과 지금 열리는 전시에 대한 심층 분석을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 구독 중인 8만명 독자와 함께 아름다운 작품과 이야기를 만나보세요. 세 권의 책으로 곁에 두실 수도 있습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