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의 빛이 기울어 세상이 따뜻한 물에 잠긴 듯 너그러워질 즈음에 우리들은 나란히 손을 잡고서 골목을 걸었다. 아이들이 바닥에 뒹구는 온갖 작은 것들을 발견하곤 내게 물었다. “이름이 뭐예요?” 그러면 나는 이름들을 찾아보며 알려주었다. 잘 외워 두었다가 다음엔 노래처럼 불러줘야지 다짐하면서.
4월에는 바닥에 핀 민들레를 세어보며 걸었다. 4월 하순엔 봉긋해진 민들레씨를 후후 불어 퍼뜨리며 돌아왔는데, 5월이 되자 민들레 진 자리에 씀바귀꽃이 다글다글 피었다. 조그만 들꽃에 불과해도 이름을 알고 나니 그때부턴 길가에, 돌 틈에, 발치에 씀바귀꽃만 보였다. 그간 씀바귀꽃 하나 모르고 다녔다는 게, 그 무심함이 새삼 신기할 정도로.
민들레가 지면 씀바귀꽃이 피어난다는 걸 아이들 덕분에 알았다. 바닥에 핀 꽃들을 궁금해하는 아이들이 궁금해서, 나는 열심히도 꽃이름을 찾아보았다. 꽃다지, 꽃마리, 별꽃, 개망초, 괭이밥, 쑥부쟁이, 꽃잔디. 꽃이름을 안다는 건 참 신비한 일이었다. 어디를 가도 꽃밖에 안 보였으니까.무럭무럭 자라나 어느덧 나를 앞질러 뛰어가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밤 산책을 나섰다. 밤하늘 아래 싸락눈처럼 흐드러진 이팝나무길을 남편과 걸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내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저 꽃은 이름이 뭐야?” 그러자 그가 대답했다. 저기 하늘에 핀 꽃은 이팝나무꽃. 지금 밤바람에 실려 오는 꽃향기, 이건 라일락. 여기 덤불에 핀 꽃은 조팝나무꽃이라고. “연애하던 시절에 네가 알려주었지”라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별걸 다 알려줬노라고 내가 쑥스럽게 대꾸하자 그가 말했다. “나는 네가 꽃이름을 알려주는 사람이라서 좋아.” 때마침 달려온 아이들이 와락, 우리를 덤불처럼 끌어안았다.
세상에 작디작은 것들,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에도 이름이 있다. 그것들을 알아보고 이름을 불러주고 싶은 마음이 무엇인지 이제 나는 안다. 내 곁에 나란히 걷는 사람의 하늘과 둘레와 발치에 피어난 작디작은 것들까지도 궁금해서 불러보고 싶은 이 마음을. 마음의 이름을 빤히 알지만 나는 부러 다른 이야기를 꺼낸다. 내가 좋아하는 시를 읽어주고 싶다고. 지천에 꽃들 피어날 때면 이해인의 시 ‘꽃이름 외우듯이’가 떠오른다고.
‘꽃이름 외우듯이/서로의 이름을 불러주는 즐거움으로/우리의 첫 만남을 시작하자/우리 서로 사랑하면/언제라도 봄/먼데서도 날아오는 꽃향기처럼/봄바람 타고/어디든지 희망을 실어 나르는/향기가 되자’ 이 마음을, 이 사랑을 아는 사람들은 꽃이름을 외울 줄 안다. 우리를 둘러싼 시간이 조금만 더 느려지도록, 우리가 느끼는 세계가 조금만 더 간직되도록. 일부러 천천히 걸음을 옮기면서 계절마다 불어올 기억이 될 꽃이름을 불러본다. 온통 너의 이름을 불러보듯이.고수리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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