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탄국가, 석유국가를 거쳐 전기국가 시대로 가는 건 너무도 당연한 문명사적 흐름입니다.”
인공지능(AI)발 전력 수요 폭증과 탄소중립이라는 거대한 파고가 맞물리며 ‘전기국가 패권 전쟁’의 막이 올랐다. 특히 미국·이란 전쟁에 따른 유가 급등은 기존 석유 중심 에너지 질서가 해체되고 전기화가 가속화하는 기폭제가 될 것이란 관측이 많다. 김태유 서울대 산업공학과 명예교수는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에너지 전환의 종착지인 전기화는 차세대 패권 전쟁의 핵심”이라며 “이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첫 단추는 전력산업의 근본 체질을 바꾸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국가 발전 관점에서 전기국가를 설명해 주세요.
“1차 산업혁명은 영국이 석탄을 동력으로 기계를 돌리고 배를 운항한 석탄국가 시대, 2차 산업혁명은 석유를 동력으로 내연기관 중심의 발전을 이룬 미국 주도의 석유국가 시대였습니다. 3차 산업혁명이 인터넷 시대였다면 4차 산업혁명은 AI와 전기가 결합하는 전기국가 시대입니다. AI 구동을 위해 막대한 전기를 확보하는 동시에 AI를 활용해 전기 효율을 극대화하는 ‘전기와 AI의 상호 결합’이 이 시대의 핵심이라 할 수 있죠. 결국 석탄국가와 석유국가를 거쳐 전기국가로 가는 건 당연한 문명사적 흐름입니다.”
▷석유 패권 전쟁도 여전히 벌어지고 있습니다.
“아직은 완벽한 전기국가로 가기 전 단계라 석유국가와 전기국가가 함께 존재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미국 같은 패권국가는 생산자형 석유국가이자 소비자형 전기국가입니다. 미국에 도전하는 중국은 소비자형 석유국가이면서 생산자형 전기국가를 지향합니다. 현재 이 두 모델이 맞물리며 세계 패권을 다투고 있는 거죠.” (생산자형 전기국가란 단순히 국내에서 전기를 많이 쓰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전기차, 배터리, 태양광, 전력반도체 등 전기화 기술 주도권을 쥐고 세계에 공급하는 역할을 하는 국가다.)
▷중국은 막대한 재정을 투입해 전기국가가 됐습니다.
“중국이 생산자형 전기국가로 성공한 것은 ‘중국 제조 2025’라는 국가적 계획을 통해 세계 제조업을 석권했기 때문입니다. 국가가 주도해 새로운 비교우위 산업을 창출한 것이죠. 반면 한국은 한동안 국가 주도로 새로운 비교우위 산업을 창출하지 않았습니다. 결과적으로 지난 30여 년간 일곱 개 정권을 거칠 때마다 경제성장률이 예외 없이 평균 1%씩 하락했죠.”
▷최근 중동 사태로 정부가 재생에너지 전환을 더 강조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전기국가로 성공하려면 전기라는 상품을 더 싸게 만들어 비교우위를 점해야 합니다. 신재생에너지를 늘리는 것은 인류가 나가야 할 방향이죠. 문제는 태양광과 풍력에서 우리가 비교열위 상태에 있다는 점입니다. 한국의 태양광발전 시간은 평균 3.5시간인데 중국 고비사막이나 미국 네바다는 7~8시간입니다. 우리나라는 땅이 좁고 단위면적당 발전량도 부족합니다. 단순히 전기 생산 원가가 높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상품 원가가 돼 국제 경쟁력을 좌우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비교우위가 있는 에너지원을 함께 써야 합니다.”
▷비교우위가 있는 에너지원은 무엇입니까.
“원자력, 특히 소형모듈원전(SMR)입니다. 이런 에너지원과 균형을 맞춰야 우리가 비교열위에 있는 재생에너지도 살릴 수 있어요. SMR은 원자력이지만 개념이 다른 신기술입니다. 미국은 버락 오바마 행정부 때 행정명령으로 SMR을 ‘신에너지’ 범주에 넣었습니다. 다만 SMR이 완전히 개발돼 경제성을 갖추기까지 시간이 걸립니다. 그 간극을 러시아산 천연가스로 메워야 합니다. 전후 경제 회복이 시급한 러시아는 한국을 자국의 값싼 천연가스를 공급할 최적의 시장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러시아 천연가스 수입을 늘리면 미국의 제재를 받을 것으로 보입니다.
“미국은 중국을 꺾기 위해 석유가 가장 효과적인 도구임을 알고 있습니다. 중동과 베네수엘라 석유는 미국이 통제할 수 있지만, 러시아에서 중국으로 가는 육로 노선은 미국이 통제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미국은 장기적으로 중국의 도전을 꺾기 위해 러시아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한국과 러시아의 관계 개선은 미국의 양해를 얻어낼 수 있는 영역입니다.”
▷생산자형 전기국가가 되기 위해 정부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비효율적인 현재 전력산업 구조를 통폐합해야 합니다. 과거 한국전력 발전 부문을 5개 화력발전사와 한국수력원자력으로 쪼갠 것은 ‘경쟁과 효율’이라는 경제 원론 수준의 지식으로 자연독점 산업에서 시장 실패를 초래한 개악이었습니다. 발전 원가의 95%는 연료비입니다. 과거 한국전력이 단일 구매자일 때는 전 세계 판매자들이 우리에게 연료를 팔기 위해 가격 경쟁을 벌이는 ‘구매자 우위 시장’이었죠. 그러나 화력발전사를 5개로 쪼개자 우리끼리 해외에서 연료 확보 경쟁을 벌여 ‘판매자 우위 시장’으로 역전됐습니다. 국가 전체적으로는 협상력을 잃고 더 비싼 비용을 지불하게 된 셈입니다.”
▷이재명 대통령이 발전사 통폐합을 주문했습니다.
“연초 대통령 업무보고에서 ‘발전 자회사를 무슨 기준으로 5개로 나눠 사장직만 5개를 만들었느냐’는 대통령의 지적이 있었습니다. 실무진이 ‘당시에는 연료 도입 경쟁을 위해 5개로 나눴다’고 답변했는데, 이는 현문우답(賢問愚答)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라도 전기국가 시대의 산업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전력산업 구조 개편을 서둘러야 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구조조정 방향은 석탄과 가스, 신재생끼리 발전원별, 기술별로 통폐합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해외에서 연료를 싸게 사고 기술을 집중 개발해 비교우위를 점할 수 있습니다.”
▷쪼개놓은 공기업을 다시 통합하는 게 비효율적이라는 비판도 있습니다.
“발전 설비는 가동 시간과 비용 특성에 따라 기저·중간·첨두부하로 나뉩니다. 이를 ‘중앙 계획’에 맞춰 적절히 배치해야 국가적 효율이 극대화됩니다. 기저부하는 설비비가 높고 연료비가 낮아 늘 돌려야 하는 반면 첨두부하는 설비비는 싸지만 연료비가 비싸 짧은 시간만 가동하는 게 경제적이기 때문입니다. 전력 수요가 폭증하는 전기국가 이행기에 발전산업에 지나치게 경쟁을 도입하면 시장 상황에 휩쓸려 특정 발전원만 비대해지고 전체 에너지 부하대의 균형이 깨질 수 있습니다.”
▷석탄 발전 등 좌초자산을 떠맡게 될 자회사나 지역사회 반발이 클 것 같습니다.
“회사가 바뀐다고 발전소 위치와 환경이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은 5개사가 수익성을 지키기 위해 원가가 싼 석탄발전 가동률을 최대한 높이고 가능한 한 늦게 퇴출시키려고 애씁니다. 이를 하나로 묶어놓으면 국가적으로 가장 비효율적인 발전소부터 체계적으로 줄여나갈 수 있습니다. 또 석탄발전을 SMR로 대체하면 클린에너지로 변신이 가능합니다. 발전산업이 연료별로 재편되면 이런 첨단 기술 전환에 집중 투자해 좌초자산을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고, 지역사회에도 매연이 줄어드니 훨씬 이득이겠죠.”
▷전력산업에서 민영화와 경쟁하는 것은 어려운 이야기인가요.
“전력 수요가 완전히 포화 상태에 이르러 전기국가가 완성된 시점이라면 민영화와 경쟁이 가능하지만, 수요가 늘어나는 과정에서 이를 무리하게 추진하면 2001년 미국 캘리포니아 블랙아웃 같은 대재앙이 초래될 수 있습니다. 과거 분리 경쟁을 주장한 이들이 실책을 인정하지 않으려다 보니 전력산업이 어정쩡한 상태에 머물게 됐고, 이것이 전기국가로 이행하는 데 큰 지장을 주고 있습니다. 사실 경쟁 효율은 소비자가 상품을 선택할 수 있을 때 발생하는데, 전기는 눈에 보이지 않아 소비자가 생산처를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배전이나 소매 단계에서는 소비자가 직접 업체를 대하기 때문에 수리 대응과 전력 품질을 기준으로 선호하는 회사를 선택하는 실질적 경쟁이 가능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배전이 아니라 발전부터 경쟁시키기 시작했는데, 이는 전력산업 특성을 무시한 대단히 잘못된 결정이었던 거죠.”
▷전기국가 시대지만 모든 것을 전기화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전기화의 빈틈을 메울 핵심 기술은 무엇이라고 봅니까.
“플라스틱 같은 석유화학 공정 에너지는 당장 전기로 대체할 수 없기 때문에 석유국가와 전기국가 공존은 당분간 불가피합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건 ‘블루수소’(화석연료를 개질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탄소를 포집한 뒤 가둬 만든 수소)입니다. 재생에너지로 생산하는 그린수소는 우리나라에서 단가가 너무 높지만 러시아 천연가스를 값싸게 들여와 블루수소를 제조하는 것은 정유·화학 기술이 좋은 우리가 잘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탄소를 포집·저장하는 CCS 기술을 결합하면 국제적인 비교우위를 점할 수 있습니다. 수소는 생산, 저장, 운반, 연료전지 활용까지 전 산업을 혁신하는 밸류체인을 형성합니다.”
■ 김태유 명예교수는 △1951년 부산 출생
△1974년 서울대 공과대학 학사
△1983년 웨스트버지니아대·콜로라도대 경제학 석·박사
△1987년 서울대 자원공학과 교수
△2003년 대통령 정보과학기술수석보좌관
△2006년~ 서울대 산업공학과 명예교수
글=김리안/사진=최혁 기자 knr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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