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꽃'으로 유명한 시인 보들레르의 결기 가득한 예술
샤를 보들레르는 '악의 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자. 이 글을 읽는 독자의 99.9%는 보들레르 시집 '악의 꽃'을 펼쳐본 적도 없을 것이고, 펼쳐봤더라도 뭐라 적혀 있었는지 기억조차 흐릿할 것이다. '악의 꽃'은 어렵다.
그러나 보들레르의 문학을 핵심만 정리한 책이 있으니, 1993년 번역 출간된 '꿈꾸는 알바트로스'다. 불문학자 앙리 페이르가 보들레르의 글을 발췌한 책인데, 원제는 '팡세'였으나 '꿈꾸는 알바트로스'로 출간됐다. 이 책에는 보들레르의 예술사상이 가득하다.
알다시피 보들레르는 시인이었다. 그러나 시인이기에 앞서 비평가였다. 보들레르는 비평가로서도 언제나 '세상 속 부정적인 것들의 예술적 가능성'을 모색했다. 그의 한 문장은 우리 내면의 정서인 끔찍함과 고뇌가 미학적인 예술로 전환되는 순간의 경이를 포착한다.
"끔찍한 것이 예술적으로 표현되어 아름다움이 되고, 고뇌가 박자와 운율을 얻어 정신을 고요한 기쁨으로 가득 채우는 것은 예술이 가진 엄청난 특권 가운데 하나이다."
우리는 예술을 아름다움에 관한 찬양적 목소리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짙다. 벚꽃은 아름답고 그것이 흩날리며 낙하하면 슬프다. 그러나 이런 단순한 도식은 그의 문학이 아니었다. 우울함, 인간의 내적 질서로부터 결코 뗄 수 없는 우울이야말로 보들레르에겐 미(美)와 연결되는 감정이었다. 예술 속에서의 기쁨은 저속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우울은 아름다움의 빛나는 반려자라고 할 수 있는 반면에, 기쁨은 아름다움에 대한 가장 저속한 장식물 중의 하나이다."
왜 그런가. 인간은 이중적인 존재여서다.
보들레르에 따르면 행동과 의도, 꿈과 현실은 언제나 이중적이고 인간은 스스로 이중적이면서 이중적인 세상을 살아간다. 예술가는 자아와 세계의 이중성을 포착하는 대리자가 되려 할 때 도약한다는 것. 보들레르는 예술가가 예술가일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자신의 이중적 본성에서 나오는 현상을 무시하지 않는 자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에게 시인(예술가)은 위대한 자들이었다. 시인은 이 무참한 세상에서 누구보다 강력하게 존재를 도모하는 존재였다.
"존경할 만한 인간들로는 세 부류만이 존재한다. 사제와 전사와 시인. 아는 것과 죽이는 것과 창조하는 것."
살아가면서 누구나 사제, 전사, 시인이 될 순 없다. 그러나 역시 살아가면서 모든 이가 어떤 의미에선 사제, 전사, 시인이기도 하다. 누구나 구원을 염원하고, 누구나 세상과 쟁투하며, 누구나 생활 속에서 자기만의 꽃 한 송이를 틔우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은 대가 없이 치를 수 없다. 보들레르는 간파해낸다. "예술은, 그것이 추구하는 희귀한 목표에 걸맞은 희생을 따랐을 때에만 가장 강력한 효과를 얻는다."
[김유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