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이 별도 심리 없이 원심판결을 확정하는 ‘심리불속행’이 재판소원 분쟁의 뇌관으로 떠오를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구체적 이유를 적시하지 않고 상고를 기각하는 절차에 대한 불만이 ‘기본권 침해’ 주장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평가다.
30일 법조계에 따르면 재판소원 도입 후 헌법재판소의 사전심사 문턱을 처음 넘은 사례가 지난 28일 심리불속행 사건에서 나왔다. 녹십자가 ‘백신 입찰담합’과 관련해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받은 과징금 20억원을 취소해 달라고 낸 소송에서 대법원이 지난 2월 심리 없이 상고 기각한 판결이다. 녹십자를 대리한 법무법인 율촌은 심리불속행이라는 절차적 문제를 적극 다퉈 재판소원 ‘1호 본안사건’을 이끌어냈다.
상고심절차에 관한 특례법(상고심법)에 따라 원심판결이 헌법에 위반되거나 대법원 판례와 상반되게 해석한 경우 등엔 대법원이 심리불속행을 할 수 없다. 율촌은 작년 12월 녹십자의 입찰담합 관련 형사사건에서 무죄가 확정된 것에 주목했다. 같은 사안을 두고 형사와 행정재판에서 상반된 결론이 나왔는데도 대법원이 심리불속행 기각을 한 건 헌법상 보장된 재판청구권 침해라고 강조했다.
율촌 공정거래그룹의 박해식·이우열·함주혜·주현민·조혜준 변호사와 재판소원 태스크포스(TF) 소속 윤용섭·김능환·권혁준·서형석 변호사 등이 협업해 헌재를 설득할 수 있었다. 이우열 변호사는 “이번 사건이 2심제(서울고등법원·대법원)로 진행되는 공정위 처분에 대한 불복 소송이라는 점이 반영된 측면도 있어 보인다”고 말했다. 법원의 제대로 된 심리를 받아볼 기회가 한 번밖에 없었다는 점이 감안됐을 수 있다는 얘기다.
대법원 법원행정처에 따르면 지난해 대법원에서 처리한 민사 본안사건 1만2360건 중 8451건(68.4%)이 심리불속행 기각이었다. 가사(85.7%)와 행정(76.8%), 특허(69.5%) 사건에선 심리불속행 비율이 더 높았다. 한 법관 출신 변호사는 “상고심법에 규정된 심리불속행 요건이 다소 추상적”이라며 “1호 사건이 나온 만큼 심리불속행에 불복하는 재판소원 청구가 늘어날 것”이라고 내다봤다.
반면 법원 내부에선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수도권에 재직 중인 한 부장판사는 “당사자가 동일한 사건이라고 하더라도 증명력이 훨씬 엄격한 형사재판과 그 외 민사재판 판결은 언제든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며 “신속한 권리 구제를 위해 상고 접수 이후 4개월 내 결론을 내도록 한 심리불속행 제도 도입 취지가 흔들리지 않을까 우려된다”고 말했다. 헌재는 2012년 심리불속행 제도에 대해서는 합헌 결정을 내렸다.
이인혁 기자 twopeopl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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