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 뱃길 따라 학교·병원 세우며...조선 근대화 이끌었던 푸른눈의 선교사

지난 24일 전북 군산 앞바다는 돛대 모양의 은빛 기념탑이 햇살에 반짝이고 있었다. 호남에 처음 복음을 전파한 미국 남장로교 소속 ‘7인의 선교사’가 타고 다녔던 배 모양을 형상화한 ‘군산 선교 기념탑’이다. 1892년 미국 버지니아항에서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하와이와 일본 요코하마항을 지난 다음 부산과 제물포항을 거쳐 다시 작은 배를 갈아타고 군산으로 온 여정을 그린 지도도 바닥에 새겨 있다. 135년 전 이들은 왜 조선땅을 밟았으며 어떤 발자취를 남겼을까.

올해 개신교 140주년을 맞이해 한국교회총연합(한교총)은 지난 24~25일 국내 언론사와 함께 ‘금강 벨트’ 지역인 전북 군산과 충남 논산 강경·공주 일대에 흩어진 개신교 근대문화유산을 탐방했다. 한교총의 근대문화유산 탐방은 이번이 4회째다.

첫 방문지는 1899년 개항 전만 해도 작은 어촌에 불과했던 군산이다. 금강과 바다가 만나는 이곳은 젊은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보기에 호남 선교의 거점으로 삼기에 적합했다. 1895년 3월 목사 윌리엄 전킨(1865~1908)과 의사 알렉산드로 D 드로(1859~1924)가 군산의 한 포구에 도착한다. 이들의 조선행에는 연세대를 세운 호러스 언더우드 선교사의 공이 컸다. 1891년 안식년을 맞아 미국으로 돌아간 언더우드는 내슈빌에서 조선 선교대회를 열고 호남에 교회가 한 곳도 없다며 십자가 복음을 호소했다. 이때 지원자가 전킨 선교사다. 그는 드루 선교사와 함께 군산 수덕산 산자락 초가집 2채를 50달러에 매입한다. 한 채는 교회, 한 채는 진료소로 썼다.

전킨과 드루가 복음을 전하고 환자들을 치료해주자, 군산 주민들은 달걀과 생선, 조개 등의 음식들과 선물을 주며 환대했다. 그러나 4년 뒤 조계지(외국인 거류지)로 정해진 군산을 일본인들이 장악하면서 선교사들은 군산의 궁멀(현 구암동)로 자리를 옮긴다. 1903년 이곳에 근대학교인 ‘영명학교’(현 군산제일고)를 세운다. 호남 최초로 교회와 학교, 병원이라는 ‘선교의 삼각축’이 완성된 것이다.

‘영원한 빛’이라는 뜻의 군산 영명학교는 1919년 한강 이남 최초의 3.1운동인 ‘3.5 만세운동’이 일어난 진원지다. 1940년엔 일제의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자진 폐교한다. 군산제일고 26회 졸업생인 소강석 새에덴교회 목사는 이날 현장에서 “성경에 나와 있는 자유, 인권, 박애의 가치가 학생들 스스로 민족운동에 나서는 원동력이 됐을 것”이라며 “군산 주민들에게 근대교육과 독립운동을 가져다준 모교가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군산과 전주를 비롯한 전북 지역의 복음화율은 30%를 웃돌며 전국 평균의 2배를 기록하고 있다. 야구와 자전거라는 신식 문화도 선교사를 통해 유입됐다. 허은철 총신대 역사교육과 교수는 “선교사들이 근대학교와 병원을 세우면서 당시 조선인들의 생각이 근대로 넘어가게 됐다”며 “미신적 의료관 대신 합리적인 위생개념이 생겼고, 유교적·중화주의적 세계관에서 자유·평등이라는 서구 민주주의 생각이 심어졌다”고 말했다.

전킨의 선교 열정은 잇단 시련과 고난에도 꺾이지 않았다. 전킨기념사업회 추진위원장인 서종표 군산중동교회 목사는 “전킨 선교사는 할아버지가 목사, 아버지가 판사로 미국 남부 유지 출신인데 화려한 스펙을 모두 버리고 이 땅에 왔다”며 “풍토병으로 어린 아들 셋을 조선 땅에 묻고 자신도 43세에 소천하며 헌신했지만 지금은 아무도 기억하는 사람이 없어서 너무 속상하다”고 말했다. 군산시는 늦게나마 전킨 최초 도착지와 첫 선교 기념비, 군산선교역사관, 구암교회, 초기선교사 묘역 등으로 이어지는 전킨 순례길을 조성했다.

금강 뱃길을 따라 죽 올라가니 논산시 강경읍이 눈에 들어온다. 육로와 수로가 만나는 곳이라 100여년 전만 해도 젓갈을 비롯한 물자가 풍부하고 사람이 몰리며 큰 장이 열렸던 곳이다. 하루에 무려 100여 척의 선박이 정박했던 때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쇠락한 시골 마을로 당시의 위엄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강경은 일제강점기 신사참배 거부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된 지역 중 하나다. 옥녀봉에 오르면 남자와 여자가 따로 예배를 봤던 ‘ㄱ’자형 유교식 예배당 터가 나오는데 한국 침례교 교회의 첫 예배당이 있었던 곳이다. 이곳에서 신도와 일반인 총 62명이 1924년 일제의 신사참배에 저항해 고초를 겪었다.

마지막 순례지로 찾은 충남 공주 역시 금강으로 둘러싸여 있다. 공주를 비롯한 충청권은 선교지 분할 협의에 따라 감리교가 들어섰다. 프랭크 윌리엄스 선교사는 1906년 공주에 영명학교를 세우며 충남에서 가장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다. 한국명 사애리시로 유명한 앨리스 해먼드 샤프 선교사는 유관순의 첫 스승으로 그를 서울 이화학당 장학생으로 편입시킨 주역이다. 그의 선교적 삶도 눈물로 얼룩져 있다. 공주에서 선교를 시작한 지 6개월 만에 남편을 전염병으로 잃었다. 그런데도 장장 39년간 한국에 머물며 20여개 여학교를 설립한 근대 여성 교육의 선구자다. 노란 개나리가 막 피기 시작한 학교 뒤편 영면동산에 오르니 선교사 묘역이 한 방향을 향하고 있다. 남편 묘비와 나란히 서 있는 사애리시 묘비엔 이런 글귀가 적혀 있다.

“우리가 당한 고난이 크고 잃은 것이 많지만 하나님께서는 어떤 식으로든 선한 길로 인도할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믿고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군산·강경·공주/이향휘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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