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적은 유명 아이돌이었다. BTS, 아이브, 에스파 등 인기 그룹을 집중적으로 겨냥했고, 특히 아이브의 장원영은 단골 타깃이 됐다. 그 결과 조회 수는 폭발적으로 늘었다. 100만 회를 넘긴 영상도 나왔다.
이 시점부터 돈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운영자는 유료 회원을 모집하며 ‘더 자극적인 비밀 콘텐츠’를 미끼로 내걸었다. 허위 정보로 구독자를 끌어모으고, 그 관심을 수익으로 전환하는 구조였다.
이 익명의 채널을 법정으로 끌어낸 이는, 사이버 명예훼손 사건을 수년간 추적해온 법무법인 리우의 정경석 변호사였다.정 변호사가 법정에서 마주한 ‘탈덕수용소’ 운영자 박모 씨(1988년생)는 가발, 모자, 안경, 마스크를 겹겹이 쓴 채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가 법정에서 내놓은 변명은 세 가지였다. “공익적 목적이었다.” “대중의 알 권리를 위한 것이었다.” “단순한 의견 개진이었다.” 자신은 인터넷에서 돌아다니는 이야기를 사실인 줄 알고 옮겼을 뿐이라고 했다.
하지만 형사 재판 과정에서 그는 끝내 이렇게 말했다. “인터넷 세상에 갇혀 살았다. 이렇게 큰 죄인 줄은 몰랐다.”
익명의 화살에 맞아 고통받는 피해자는 있었다. 그러나 ‘사이버 레카’에 대한 법적 대응은 번번이 수사 중지로 끝났다. 플랫폼이 외국에 있다는 이유였다. ‘사이버 레카’ 사이에선 ‘잡히지 않는다’는 믿음이 퍼져 있었다.
장원영의 소속사 스타쉽의 의뢰를 받은 정경석 변호사 역시 벽에 부딪혔다.
수사가 시작됐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탈덕수용소’ 운영자는 채널을 삭제한 것이다. 수십 개에 달하던 영상도 지워졌다. 정 변호사는 채널 삭제와 함께 신원 정보도 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급해졌다.
“법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영역이 있다는 게 말이 되나?” 그때마다 정 변호사는 스스로 물었다.
정 변호사는 미국의 ‘디스커버리 제도’를 찾아냈다. 미국 법원을 통해 미국에 있는 제도를 이용해 ‘탈덕수용소’의 신원 정보를 받아내는 방법이었다.한국에서는 거의 시도된 적 없는 통로였다. 그는 되든 안 되든 그가 가진 방법을 써보기로 했다.
미국 변호사들도 성공 사례가 많지 않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정 변호사는 집요함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첫 단계는 악성 게시글과 댓글 수십 개를 하나하나 번역해야 하는 일이었다. “이름부터 막혔다. ‘탈덕’이란 말이 뭔지부터 설명해야 했다.”
표현의 자유를 우선하는 미국 법 아래, ‘조롱’과 ‘모욕’의 경계를 짚어야 했다. 단순 번역만으로는 부족했다. 정 변호사는 왜 이 발언들이 허위인지, 왜 피해자의 명예를 침해하는지 맥락까지 풀어내야 했다.
3차례의 시도 끝에 구글로부터 가입자 정보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는 “메일로 온 압축파일을 열었을 때, 그 안에 담긴 이름, 주소, 금융정보를 확인했을 때, 그리고 국내에서 뽑은 초본과 모든 정보가 정확히 일치했을 때”를 강조했다.
화면 너머에만 존재하던 익명이 처음으로 수면 위에 떠오른 순간이었다. 그는 “이게 진짜 되는구나. 이게 되네”라고 속으로 되뇌었다.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신원을 특정해 소환장을 보내는 단계만 끝난 것이었다. 그는 허위 정보로 얻은 수익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어떻게 벌었는지, 얼마나 벌었는지, 그 돈이 어디로 갔는지를 추적했다.
“채널 운영자가 빌라도 가지고 있었다. 유튜브 수익으로 산 거였다” 정 변호사는 유튜브 수익까지 추징했다.
그는 “이걸 그대로 두면, 명예훼손을 통해 돈을 벌 수 있다는 메시지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2억을 벌었는데 벌금이 5000만 원이면 1억 5000만 원은 이득이 되는 셈”이라며 그는 “명예훼손으로 이익을 얻을 수 없다는 걸 분명히 하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정 변호사는 범죄 수익 몰수에 대해 “근본적인 범죄 동기를 박탈했다”고 평가했다. 이어 그는 “내가 한 행동이 누군가에게 고통을 줄 수 있고, 그로 인해 책임을 져야 할 수도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탈덕수용소’는 외국 플랫폼 이용자의 익명을 국내에서 처음으로 밝혀낸 사례가 됐다. 이후 비슷한 방식으로 이어진 사건은 20건이 넘는다.
‘불가능’이라 여겨지던 길 위에, 정 변호사는 하나의 확실한 선례가 남겼다.
정 변호사는 닷컴 버블(2000년대 초반, ‘.com’만 붙이면 투자금이 쏟아지던 시절)의 열기 속에서 변호사 일을 시작했다고 회상했다. 세상은 새로운 기술에 들떠 있었다. 그는 그 안에서 법의 과제를 떠올렸다. 화면 속을 흘러가는 정보가 언젠가는 법의 대상이 될 거라고 확신했다.
자연스럽게 ‘얼리어답터가 될 수밖에 없는’ 변호사가 됐다. 변화하는 기술을 배우고 기술의 속도를 따라잡는 게 그의 일상이다.
정 변호사는 또 다른 과제를 마주하고 있다. 가입 정보조차 남기지 않는 플랫폼. 이메일이나 이름 등이 암호화돼 저장하지 않는 시스템이다. 플랫폼 측은 “회원 정보를 저장하지 않는다”며 협조를 거부하기도 한다.
정 변호사는 “정말 정보가 없는 건지, 아니면 제공을 피하려는 건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기술은 점점 더 빠르고 정교해지지만, 법은 그 속도를 따라잡아야 한다. 그는 여전히, 문을 두드리고 있다.
김수연 기자 xunnio41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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