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2004년 작 영화 ‘비포선셋’에서, 남자 주인공 제시는 출판기념회로 방문한 파리에서 여자 주인공 셀린을 9년만에 재회하고, 전편 ‘비포선라이즈’ 때와 마찬가지로 골목과 카페를 거닐며 각자의 삶을 각자의 화법으로 빈틈없이 쏟아 낸 후, 복귀 비행시간이 임박했음에도 셀린의 집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제시가 책장에서 니나 시몬(Nina Simone) LP를 발견하고 ‘Just in Time’ 노래를 틀자, 셀린은 니나 시몬의 목소리를 흉내내며 제시에게 “Baby, you are gonna miss that plane(자기, 비행기 놓치겠어)”라는 마음에 없는 말을 건낸다.
섣부른 개입보다 신중한 대비를
가장 완벽한 타이밍에 의사결정을 해야 한다는 생각은, 개인, 기업 그리고 정부 규제 당국의 정책 집행자 머리 속을 늘 지배한다. 하지만 인공지능(AI)과 같이 산업 구조 변화가 전례 없이 빠른 분야에서는, 섣부른 ‘저스트 인 타임(Just in Time)’의 개입 의욕보다 위기관리를 위해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는 ‘저스트 인 케이스(Just in Case)’로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접근 방식이 효과적일 수 있다.
현재 글로벌 클라우드 서비스는 단순한 인프라 제공의 수준을 넘어 AI와 결합된 국가적 전략 자산으로 진화했다. 생성형 AI의 폭발적 성장은 클라우드 시장을 고도화시키고 있고, 아마존웹서비스(AWS), 구글 등 글로벌 사업자들의 관련 자본 지출은 2026년 6000억 달러를 초과할 것으로 예상된다.
글로벌 경쟁당국 중 유럽연합(EU)은 데이터법[Data Act, Regulation (EU) 2023/2854]을 통해 2027년 1월까지 모든 형태의 데이터 이전 수수료를 단계적으로 금지하도록 명시했고, 디지털 시장법(DMA)을 가동해 대형 클라우드 사업자를 ‘게이트키퍼’로 지정하기 위한 심사를 진행 중이다. 한편 미국 연방거래위원회(FTC)도 2025년 1월 「클라우드 서비스 제공자와 AI 개발자 간의 파트너십 및 투자에 관한 FTC 스태프 보고서(FTC Staff Report on AI Partnerships & Investments)」를 통해서 빅테크와 AI 스타트업 간의 결합이 신규 AI 스타트업의 컴퓨팅 자원 접근을 차단하고 전환 비용을 높이는 배타적 장벽으로 작용할 수 있음을 밝히고 있다.
시장 특성에 맞는 한국형 규제 설계
이처럼 각국 당국들은 AI와 클라우드 시장의 공정경쟁을 검토하고 있는데, 중요한 것은 각국 시장에 맞는 규제와 연구이다. 미국은 90%를 훌쩍 넘는 압도적인 채택률을 보이며, 사실상 거의 모든 기업 인프라가 클라우드로 옮겨가고 있는 가장 성숙한 시장으로 평가된다. 유럽은 평균 52.7%의 기업이 사용 중이며, 핀란드 등 북유럽 국가를 중심으로 채택률이 70% 후반대까지 꾸준히 상승하고 있다. 한국은 민간 기준으로는 높은 수준의 도입률을 보이고 있으나, 공공 부문(45%)의 성장이 시장 확대의 주요 과제로 남아있다.
AI와 클라우드 시장은 수개월 단위로 새로운 혁신이 쏟아지는 곳이다. 규제 당국이 사전에 허용된 사업 모델과 기술 방식만 규정하는 포지티브 규제 잣대를 들이댄다면 기술 진보의 속도를 지연시킬 위험이 있다. 특히 한국은 자생적인 AI · 클라우드 인프라 생태계 구축을 위해 국산 AI 반도체를 활용하여 클라우드 풀스택 핵심 기술을 개발할 수 있는 역량과 환경이 조성되어 있는 시장이다. 또한 현재 공공 부문의 퍼블릭 클라우드 도입률은 낮은 수준이어서 민간 클라우드 기반의 공공 서비스 시장의 확대와 고도화를 유도할 수 있는 좋은 여건에 있다.
시장 연구 기반의 네거티브 규제
그렇다면 한국에서는 섣부르게 적기를 재는 ‘저스트 인 타임’의 쫓김에서 벗어나, AI와 클라우드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하면서 명백한 반경쟁적 부작용이 발생할 만약의 경우(Just in case)에만 정밀 타격하여 금지하는 ‘네거티브 규제’ 도입을 적극 고려할 수 있지 않을까?
이를 위해서는 규제 당국의 성과에 대한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 직접 규제나 제재에 인력과 시간을 쏟는 대신 시장이 성숙할 때까지 정교한 시장 조사(Market Study)와 학계 토론 등을 지원하고 활성화하는 것도 규제 당국의 성과로 인정되어야 한다. 해외 시장과 국내 시장의 지형을 비교하고, 다른 국가의 규제 방식을 단순히 추종하지 않으면서 국내 시장에는 어떤 규제 방식이 필요한지, 면밀한 시장 연구를 바탕으로 부작용에 대비하는 ‘저스트 인 케이스’ 시각의 네거티브 규제를 사회적으로도 인정하는 분위기가 필요하다. 공정거래위원회도 최근 변화하는 시장에 맞춰 AI 및 클라우드 관련 시장 조사 용역을 발주하고 있는데, 이를 더 다양하고 폭넓게 할 수 있도록 예산을 지원해야 한다. 또한 규제 당국이 시장 조사 과정에서 여러 이해관계자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공론화의 장을 주도할 수 있도록 독려해야 한다.
영화 ‘비포섯셋’에서 제시는 공항으로 가야 하는 압박 속에서도 결국 ‘서로를 다시 찾았다’는 안도감으로 셀린과의 마지막 순간을 즐긴다. 이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폭풍 같은 대화를 거쳐 각자 삶의 지향이 변모되었음을 충분히 인식하고 내린 선택이어서 더 후회없어 보인다.
[BKL 공정거래리포트]에서는 변화하는 경쟁법 환경 속에서 기업이 직면하는 주요 규제 이슈, 공정거래 정책 동향, 주요 판례와 조사 사례를 분석하고 기업 경영과 의사결정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시사점을 공유하고자 합니다. 강일 변호사는 다양한 산업분야의 시장지배적지위 남용행위, 부당한 공동행위, 기업결합, 불공정거래행위 등의 공정거래 사건 및 관련 이슈들의 컴플라이언스 업무에 대한 자문 및 소송업무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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