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문화유산 지킴이들] 〈2〉양동호 대목장
4대 고궁-종묘-능원 13곳 보수 참여… “불 탄 숭례문 해체땐 한숨도 못 자
프리랜서 했으면 큰돈 벌었겠지만 유산 지키는 사명감에 공무원 남아”
45년간 서울 4대 고궁과 종묘, 13개 능원을 보수해 온 대목장(大木匠) 양동호 씨(70)를 최근 서울 종로구 창덕궁에서 만났다. 그는 1969년 창경궁에 입사한 뒤 1980년부터 궁능유적본부 직영보수단에서 전각과 담장, 왕릉 등을 손봤다. 프리랜서로 나섰다면 제법 돈을 손에 쥐었을 터. 하지만 “우리 유산을 지킬 소임이 있다”는 사명감으로 2015년 정년 퇴임 때까지 공무원으로 일했다. 현재는 촉탁직으로 근무 중이다.
양 대목장의 일과는 관람객의 발길이 닿지 않는 오전 5시 반에 시작된다. 1년 치 잡힌 보수 계획을 꼼꼼히 살핀다. 풍화나 충해 등에 약한 목조 건축물은 언뜻 사소해 보이는 문제도 보수를 지체해선 안 되기 때문이다.예컨대 지붕에 쓰이는 수제 기와는 겨울철 깨지기 쉽다. 그 틈으로 눈이나 비가 새서 적심층 목부재까지 상하면 피해가 막대하다. 양 대목장은 “기와는 한두 장 손상됐어도 즉시 교체하는 것이 고건축 관리의 기본”이라고 했다.
고건축 보수는 납품받은 목재를 건조하는 것부터 그의 손을 거친다. 건물에 쓰인 원부재와 가장 비슷한 색깔, 나이테를 가진 목재를 찾아 톱질, 마감까지 손수 한다. 양 대목장은 2002년 서울 강남구 선정릉의 수복방(守僕房) 복원을 포함해 여러 공사에서 총책임자를 맡았다.
“일제강점기에 나라를 잃었던 능은 그 뒤로도 예산이 없어 볼품없는 채로 있었어요. 능원 좌우로 있어야 할 수복방과 수라간은 훼손돼 없어진 상태였지요. 너무 안타까워서 직접 나섰습니다. 끈질기게 복원을 설득한 끝에 공사에 착수할 수 있었어요.” 궁궐의 문살 한쪽까지 무엇 하나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는 만큼 궐 내부에 대해서라면 모르는 게 없다. 대한제국 영친왕의 왕비인 이방자 여사(1901∼1989)의 장례를 앞두고 누구도 행방을 모르던 재궁(梓宮·생전에 제작해 놓은 왕과 왕비 등의 관) 역시 양 대목장이 찾아냈다. 그는 “창덕궁 의풍각에 보관돼 있었다”며 “알 만한 사람은 오래전 퇴직했거나 돌아가셨기에 다들 우왕좌왕하고 있었다”고 회상했다.“이방자 여사가 생전 기거하던 창덕궁 낙선재를 제가 자주 수리했어요. 어느 날 저를 따로 부르시더니 손수 그린 매화 그림을 허리 숙여 선물하신 적도 있어요. 재궁을 찾았을 땐 그 마음에 겨우 보답한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양 대목장은 현재 궁능유적본부 최고참이자 역대 최장기 근무 직원으로서 근대와 현대를 잇는 추억도 다채롭게 갖고 있다. “쪽머리에 하얀 한복을 입으시고 낙선재 툇마루에 앉아 멀거니 남산을 보셨다”는 덕혜옹주(1912∼1989)에 대한 추억도 있다. 그는 “햇볕이 좋은 날이면 툇마루에 걸터앉고는 하셨다”며 “말년에 조울증 등을 앓으셔서 제대로 대화를 나눠본 적은 없지만, 왜소하던 어깨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고 떠올렸다.
현재 양 대목장이 소속된 직영보수단은 국가유산에 문제가 생겼을 때 가장 긴급하게 파견되는 조직이다. 2008년 방화로 불탄 숭례문의 지붕을 해체한 것도 이들이었다. 비계를 설치할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아 무너진 잔해를 밟고 올라가 시꺼멓게 탄 부재를 아슬아슬하게 끌어내렸다. 그는 “당시 혹여나 밤새 눈발이 적심 속으로 들어가 피해가 커질까 봐 잠 한숨 못 자고 눈을 털었다”고 했다.
요즘 양 대목장은 후배들에게 전통 수리법을 전수하며 큰 보람을 느끼고 있다. 그 역시 중학교 졸업 뒤 열일곱 살 때부터 여러 스승을 따라다니면서 도제식으로 기술을 배웠다. 최대 10년까지 가능한 촉탁직도 올해 9월 끝나지만 “손에서 연장을 놓을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고 했다.
“실은 7, 8년 전 대장암 말기 진단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때도 계속 일했지요. 딱히 아픈 것도 못 느꼈거든요. 평생 궁궐에서 받은 정기가 저를 보우한 걸까요, 하하. 돌이켜봐도, 이 일은 내 천직이었어요. 한 번도 후회한 적 없습니다.”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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