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황규인]해마다 6월 21일을 앞두면 박승일이 떠오르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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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인 스포츠부 차장

황규인 스포츠부 차장
전에 없던 취미가 하나 생겼다. 다른 언론사 기자에게 ‘팬레터’를 보내는 일이다. 옛날 e메일을 정리하다가 “아침에 출근했더니 우리 사회부장 두 눈이 벌겋더라고요.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황 기자 기사를 내밀었어요. 덕분에 나도 눈물 찔끔했습니다”라고 경쟁지 문화부 데스크가 보낸 편지를 발견한 게 계기였다. 10년도 훌쩍 지난 메일을 지우지 않고 있을 정도로 경쟁지 기자에게 응원을 받은 건 퍽 기분 좋은 경험이었다. 그래서 다른 회사 기자들도 그 기분을 느끼게 해주고 싶다는 바람이 생겼다.

그러다 3월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기간에는 미국 기자에게도 팬레터를 썼다.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 공식 홈페이지 MLB.com에서 ‘데이터 저널리즘’을 책임지고 있는 세라 랭스 기자(33)였다. 랭스 기자는 이 대회 기간 매일 경기 기록을 정리해 전 세계 취재진에 뉴스레터 형태로 보냈다. 이 뉴스레터 발신자가 랭스 기자라는 걸 확인한 뒤 ‘언제 또 내 메일함에 그대 이름이 뜰지 기다려진다’며 연애편지급 응원 메시지를 보냈다.

사실 랭스 기자에게 답장이 오리라고 살짝 기대했다. 그러다 한국이 WBC 2라운드 첫 경기(8강)를 치른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 론디포파크 기자실에서 랭스 기자를 직접 만난 뒤 그게 얼마나 큰 욕심인지 깨달았다. 랭스 기자의 건강이 생각보다 더 좋지 못했기 때문이다. 랭스 기자는 휠체어에 앉아 안구 인식 프로그램으로 휴대전화를 조작했다. 그러면 옆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남자친구)이 이를 타이핑하는 방식으로 글을 썼다.

랭스 기자는 2022년 흔히 ‘루게릭병’이라고 부르는 근위축성측삭경화증(ALS) 진단을 받았다. ALS는 감각 신경은 건드리지 않고 운동 신경만 파괴하는 병이다. 몸에 있는 모든 근육이 굳게 되는 것이다. 랭스 기자가 자기 글을 쓰는 데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이유다. 나중에는 호흡에 필요한 근육까지 굳기 때문에 인공호흡기에 의존해야 한다. 발병 원인은 아직 모른다. 이 병에 이름을 남긴 뉴욕 양키스 프랜차이즈 스타 루 게릭(1903∼1941), 현대 천체물리학의 거장 스티븐 호킹 박사(1942∼2018) 그리고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에 등장한 모리 슈워츠 교수(1916∼1995)가 이 ALS 환자다.

한국에서는 농구 선수였던 박승일(1971∼2024)이 가장 유명한 ALS 환자였다. 미국 연수 중 ALS 진단을 받은 박승일은 ‘국내 최초 ALS 전문 병원을 짓겠다’는 목표로 자선 활동에 열심인 가수 션 씨(54)와 함께 비영리재단법인 ‘승일희망재단’을 만들었다. 그러나 끝내 병원이 문 여는 걸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국내에 한 곳뿐인 ‘승일희망요양병원’이 경기 용인시에 문을 연 건 그가 세상을 떠난 이듬해였다. 승일희망재단은 날짜별 수입·지출 내역을 1원 단위까지 100% 투명하게 공개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만큼 재단을 투명하게 운영하는 것이다.

절기상 하지(夏至)인 21일은 ‘세계 ALS의 날’이다. 1년 중 낮이 가장 긴 이날처럼 희망을 잃지 않겠다는 의미를 담아 이날을 선택했다. 누군가를 응원하고 싶다면 이날 하루만큼은 ALS 환자를 떠올리는 것도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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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인 스포츠부 차장 kin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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