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T, 규제 개정 초안 입수 보도
글로벌 시장 경쟁력 키우려
성장 막는 M&A 심사기준
‘점유율 → 혁신’ 전환 검토
일부국 “공정성 저해” 우려
EU, 연내 최종 가이드 확정
유럽연합(EU)이 글로벌 시장에서 미국과 중국의 거대 기업에 맞설 ‘유럽 챔피언’을 육성하기 위해 인수·합병(M&A) 규제를 20년 만에 대폭 완화한다.
파이낸셜타임스(FT)가 입수한 규제 개정 초안에 따르면 EU 집행위원회는 향후 M&A 승인 여부를 판단할 때 기존 소비자가격 상승과 경쟁 제한을 중심 기준으로 삼았던 것에서 벗어나 혁신, 투자, 단일 시장 회복력 등을 보다 중요하게 반영할 방침이다.
새로운 가이드라인은 기업 간 통합이 연구개발(R&D) 역량을 얼마나 키울 수 있는지, 공급망 안정성에 기여하는지, 그리고 데이터 독점과 인공지능(AI) 경쟁 등 급변하는 시장 환경에서 생존 가능한 규모를 갖추는지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하게 된다.
이는 2004년 현행 M&A 규정이 도입된 이후 가장 큰 변화로, EU 경쟁 정책이 기업의 규모 확대를 통한 글로벌 경쟁력 강화로 무게중심이 이동하는 신호로 해석된다.
이러한 정책 변화는 최근 유럽을 둘러싼 경제·지정학 환경 변화와 맞물려 추진되고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에너지 위기와 공급망 충격이 이어졌고, 이란 전쟁까지 겹치며 유럽 경제의 취약성이 드러났다. 이에 따라 마리오 드라기 전 유럽중앙은행 총재의 보고서 등에서 제기된 ‘유럽의 경쟁력 약화’ 비판을 수용해 기업 규모 확대와 공급망 안정성을 동시에 확보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확산됐다.
EU 내부에서는 미국 빅테크와 중국 국유 기업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일정 수준 이상의 규모를 갖춘 회사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커지고 있다. 특히 2019년 독일 지멘스와 프랑스 알스톰의 철도 사업 합병을 EU가 불허한 사례는 규제 완화론자들 사이에서 ‘유럽 챔피언’ 탄생을 가로막은 대표적 실책으로 회자된다. 당시 합병 무산은 중국 국영 철도사(CRRC)의 독주에 대응할 유럽 기업의 성장을 막았다는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이번 개편 작업을 주도하고 있는 테레사 리베라 EU 경쟁담당 집행위원은 규제 완화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이것이 기업들에 대한 무분별한 특혜는 아님을 분명히 했다.
그는 “새 가이드라인이 기업들에 대한 ‘백지수표’가 아니다”며 “합병의 이익을 업체가 충분히 입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단순한 규모 확대를 위한 기대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으며 실질적인 투자 증대와 혁신 가속화가 증명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소비자가격, 환경 영향, 시장지배력 남용 가능성 등도 종합적으로 평가할 예정이다.
리베라 집행위원은 유럽 기업의 경쟁력 저하 원인이 규제뿐만 아니라 ‘시장 분절화’에도 있다고 지적했다. 회원국별로 상이한 규제 체계가 기업의 국경 간 확장을 가로막고 있다는 지적이다.
특히 통신 산업의 경우 유럽 27개국 시장이 사실상 분리돼 있어 규모의 경제를 확보하기 어렵다는 문제가 대표적 사례로 거론된다. 이에 따라 EU는 M&A 규제 완화와 더불어 단일 시장 내 규제 통합 작업도 같이 추진할 계획이다.
다만 ‘유럽 챔피언’ 전략을 둘러싼 반대 여론도 거세다. 핀란드, 아일랜드, 체코,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등 5개국은 최근 공동 의견서를 통해 “기업 규모 확대 자체가 목표가 돼서는 안 된다”고 반발했다.
이들은 엄격한 경쟁 규제야말로 단일 시장의 공정성을 유지하는 핵심 장치이며, 인위적인 챔피언 육성보다는 경쟁 압력이 존재할 때 진정한 혁신이 일어난다고 주장했다. 또 현행 제도 아래에서도 경쟁력이 입증된 경우 충분히 대형 기업이 등장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경제학계에서도 비판적인 목소리가 나온다. 기업 규모 확대가 곧 투자 증가나 혁신으로 이어진다는 실증적 근거가 부족하며, 오히려 경쟁 압력 감소로 투자 유인이 약화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대형 기업 중심의 시장 재편이 소비자가격 상승과 혁신 둔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EU 내부의 정책 균열도 분명하다. 프랑스와 독일 등 주요 강대국은 전략 산업 보호와 경쟁력 강화를 위해 규제 완화를 지지하고 있다. 반면 북유럽과 소규모 개방경제 국가들은 엄격한 경쟁 규제가 단일 시장의 공정성을 유지하는 핵심 장치라며 맞서고 있다.
EU 집행위는 곧 구체적인 초안을 공개하고 이해관계자들 의견을 수렴해 올해 4분기 내에 최종 가이드라인을 확정할 방침이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글로벌 시장의 현실을 반영해 유럽 기업의 성장을 지원해야 한다”며 이번 개편안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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