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 반도체 공급난 대비
납품 강제 조항 입법추진
유럽연합(EU)이 반도체 공급 부족 사태가 발생할 경우 유럽 내 반도체 제조업체에 기존 계약보다 특정 주문을 우선 처리하도록 강제할 수 있는 긴급 개입 권한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28일(현지시간)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EU 집행위원회는 이 같은 내용을 담은 반도체법(Chips Act·칩스법) 초안을 마련했다.
초안에 따르면 EU는 무기·의료기기·디지털 인프라 등 핵심 산업에 필요한 반도체 공급 부족이 발생할 경우 기업들에 생산능력과 공급망 관련 정보 제출을 요구할 수 있다. 이를 거부하는 기업에는 최대 30만유로(약 5억2500만원)의 벌금을 부과할 수 있다.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은 EU가 반도체 제조업체들에 기존 계약보다 위기 대응 물량을 우선 공급하도록 강제할 수 있다는 점이다. 초안에는 “기존 계약을 무시하고 위기 대응 핵심 제품 주문을 우선 처리하도록 반도체 제조업체에 강제할 수 있다”고 명시됐다.
EU는 회원국 간 반도체 확보 경쟁을 막기 위한 공동구매 제도도 도입할 계획이다.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백신 공동구매 방식을 본뜬 것으로, EU가 여러 회원국을 대신해 중앙구매자로 나서 협상력을 높이는 구조다.
EU가 이처럼 강경한 대응에 나선 배경에는 반도체 공급망을 둘러싼 지정학적 긴장이 자리하고 있다. 미국과 중국의 기술 패권 경쟁이 격화되는 가운데 대만 해협 리스크까지 커지면서 반도체를 경제안보 자산으로 관리해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초안에서 EU는 “첨단 반도체 부문에서 미국과 아시아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고 인정했다. 실제로 EU 내 고성능 반도체 공급의 90% 이상은 TSMC가 위치한 대만에 집중돼 있다.
EU는 중국의 대만 무력 위협이 현실화할 경우 스마트폰과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자동차, 의료장비 등 글로벌 산업 전반에서 심각한 반도체 공급난이 발생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중국이 반도체를 경제적 압박 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경계심도 커지고 있다. 실제로 지난해 네덜란드 정부는 중국계 소유 반도체 기업인 넥스페리아가 유럽 내 생산시설과 자산을 외부로 이전할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를 제기하며 경영권 개입에 나섰다. 이후 중국 내 넥스페리아 생산라인에서 유럽으로 향하는 공급이 급감하면서 일부 유럽 자동차 업체들은 생산 감축을 겪었다.
다만 이 법안의 실효성에 대해 의문도 제기된다. EU의 글로벌 반도체 생산 비중은 현재 10%에도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2030년까지 이를 두 배로 확대하겠다는 목표를 세웠지만 달성 여부는 불투명한 상황이다.
또한 유럽 주요 반도체 기업인 인피니언, NXP, ST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 등은 자동차·통신·전력 반도체에 강점을 갖고 있지만 AI 서버용 반도체나 엔비디아 그래픽처리장치(GPU)와 같은 최첨단 고성능 칩 생산능력은 사실상 없는 수준이다.
이에 따라 EU의 이번 법안 추진은 경제안보 강화라는 상징성은 크지만, 첨단 반도체 확보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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