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 한국 증시는 바야흐로 K반도체의 ‘무적 시대’가 열린 것처럼 반응했다. 코스피 지수는 장 시작과 함께 단숨에 8400선을 돌파하며 폭발적인 랠리를 연출했다. 반도체 슈퍼사이클에 올라탄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의 질주가 시장을 견인했다. SK하이닉스 주가는 10% 넘게 오르며 시가총액이 1600조원을 넘어섰다. 삼성전자에 이어 국내 두 번째로 시가총액 1조달러 클럽에 진입했다.
지수보다 더 뜨거운 건 반도체에 대한 시장의 확신이다. 이날 국내에 처음 상장된 삼성전자·SK하이닉스 단일종목 레버리지 ETF에 2조원이 넘는 거래대금이 몰렸다. “지금 안 타면 뒤처진다”는 조급증까지 가세했다. 하지만 과열된 증시가 K반도체의 위기를 가리는 착시를 일으키고 있다는 경고도 동시에 나왔다.
◆첫번째 경고- 삼성전자가 쪼개지고 있다
이날 삼성전자 노사의 성과급 잠정합의안이 타결됐다. 조합원 95.5%가 투표에 참여해 73.7%의 찬성으로 가결됐다. 지난 2025년 12월 임금교섭 첫 상견례 이후 6개월간 이어진 분쟁이 마무리됐다. 정부의 파업 시 100조원 손실 우려, 이재용 회장의 사과, 이재명 대통령의 경고까지 동원된 끝에 봉합됐다.
투표 결과를 뜯어보면 삼성 반도체 경쟁력의 요체인 ‘원 삼성(One Samsung)’은 치명적인 내상을 입었다. 반도체(DS) 부문이 속한 초기업 노조의 찬성률은 80.6%, 2대 노조 전삼노의 찬성률은 21.1%에 불과했다. 성과급 ‘100배 격차’가 불러온 결과다. DS 사업부는 올해 평균 6억원 수준의 성과급을 받는 데 비해 휴대폰과 가전이 속한 DX 부문 직원들의 보상 규모는 600만원 수준에 그친다. 삼성전자가 숱한 위기를 단일한 조직 문화로 돌파해 ‘원삼성’의 기반이 내부에서부터 흔들리고 있다는 신호다. DS와 DX사업부의 결별과 분사 가능성까지 나온다.
주주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태세다. 소액주주 모임인 ‘대한민국 주주운동본부’는 주주명부 열람에 나서며 임시주주총회 소집을 요구할 계획이다. 영업이익 연동 성과급 지급이 이사회와 주주총회의 고유 권한을 침해하고 상법상 강행 규정을 위반했다고 주장했다. 주주단체는 잠정 합의안에 찬성한 이사 전원을 대상으로 상법상 ‘이사 충실의무’ 위반을 이유로 손해배상 청구 대표 소송까지 예고했다.
◆두번째 경고- 中 화웨이의 ‘EUV 없는 1.4나노’ 선언
두 번째 섬뜩한 경고음은 중국에서 울렸다. 미국의 촘촘한 수출 통제 그물망 속에서 고사할 줄 알았던 화웨이가 꺼내든 ‘타우(τ)의 법칙’이 그것이다. 허팅보 화웨이 하이실리콘 사장은 25일 열린 반도체 콘퍼런스 행사에서 “2031년까지 ASML의 극자외선(EUV) 노광 장비 없이도 1.4나노급 첨단 칩 성능을 구현하겠다”는 청사진을 발표했다. 반도체의 회로 선폭을 줄이는 ‘무어의 법칙’이 물리적 한계와 경제성 문제에 부딪힌 상황에서, 칩 내부의 신호 전달 시간을 단축하는 ‘로직 폴딩(Logic Folding)’ 기반의 시간 축소(타우) 기술로 돌파구를 찾겠다는 전략이다. 1.4나노는 삼성전자, TSMC, 인텔도 수년 안에 양산을 목표로 하는 차세대 공정 수준이다.
화웨이의 계획은 선언에 가깝다. 수율, 전력효율, 원가, 양산 가능성은 검증되지 않은 상태다. 하지만 미국이 2019년부터 쌓아온 대중 제재의 벽을 우회해 넘어서겠다는 전략을 공식화했다는 점은 가볍게 넘길 수 없다.
시장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발표 당일 중국 증시에서 중국 파운드리 기업 SMIC는 상한가에 육박했고, 화훙반도체는 20% 가격제한폭까지 상승했다. 미국의 수출 통제가 중국의 기술 자립을 가속화할 것이라는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의 숱한 경고가 현실화한 순간이다. 중국 정부의 지원을 등에 업은 YMTC(양쯔메모리)와 CXMT(창신메모리)의 추격도 매섭다. 이들 중국 메모리 기업의 시장점유율이 올해 10% 가까이를 차지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축포를 터뜨리는 순간 중국은 K반도체를 겨냥한 화살을 시위에 걸고 있는 모양새다.
◆세번째 경고- 짙어지는 K반도체 생태계의 그늘
앞선 내우외환보다 더 짙은 그늘은 ‘K반도체 생태계’ 그 자체에 있다. ‘삼전닉스’가 70%가 넘는 이익률을 내세우지만 두 곳을 제외하곤 글로벌 무대에서 명함을 내밀 만한 팹리스(반도체 설계)나 소부장(소재·부품·장비) 기업은 전무하다시피 하다. 반도체산업은 거인 혼자서 뛸 수 있는 단거리 경주가 아니다. 팹리스와 파운드리, 소부장이라는 거대한 생태계 전체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야 승리할 수 있는 국가 총력전이다.
시가총액 5000억원 이상 국내 반도체 소부장 기업 80곳의 실적을 한국경제신문이 분석한 결과 지난해 평균 영업이익률은 9.9%로 한 자릿수였다. 이 중 13곳은 올 1분기 적자를 기록했다. 지난해보다 7곳이나 늘었다. 양대 반도체 기업이 뿌리는 낙수 효과가 작고, 일부 기업에만 혜택이 돌아가면서 양극화가 심해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장비 생태계는 네덜란드와 일본에 의존하고 있고, 주요 원자재는 중국이 공급을 중단하면 반도체 라인이 멈출 판이다. 대만에 주도권을 내준 첨단 패키징산업의 현실은 반도체 강국이라는 타이틀을 무색하게 한다. K반도체의 생태계가 위험한 이유는 간단하다. 원청의 단가 압박 속에 낮은 이익률로 버티는 첨단 패키징과 후공정 분야 소부장 기업은 기술 투자를 감당할 수 없다.
K반도체의 위기는 슈퍼 호황이 너무 커 위기의 징후 자체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코스피 8400, ’삼전닉스‘ 레버리지 ETF 2조원, 6억원 성과급, 시총 1조달러 같은 숫자는 화려하다. 그 이면에는 삼성전자의 성과 배분 갈등, 중국의 우회 혁신, 취약한 소부장 생태계가 도사려 있다. K반도체의 이면에 자리 잡은 균열을 외면한다면 K반도체의 찬란한 봄은 생각보다 훨씬 빨리 끝날지 모른다.
이심기 수석 논설위원 sgl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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