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레드테크’의 공세가 거세다. 인공지능(AI)부터 자율주행, 휴머노이드 로봇까지 첨단 산업에서 중국의 기술력과 테크기업은 세계 최고 수준으로 올라섰다. 미국의 기술 제재에도 보란 듯 기술력을 과시하고 있다. 하지만 중국의 경제 현실은 다르다. 물가는 속절없이 떨어지고 실업률은 치솟고 있다. 중국 경제를 떠받쳐온 주택가격도 하락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기술 굴기와 디플레이션이 공존하는 것이다. ‘두 얼굴’이 공존하는 중국 경제를 어떻게 봐야 할까.
AI·로봇에만 매달리다 스텝 꼬인 中
올초 춘제(중국 설) 연휴에 5억 명 이상이 시청한 중국중앙TV(CCTV) 특집 쇼에서 중국 대표 로봇 기업 유니트리의 휴머노이드 16대가 붉은 옷을 입고 화려한 군무를 펼쳐 전 세계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곧이어 딥시크가 오픈AI의 대항마로 떠오르더니 세계 최초의 휴머노이드 하프 마라톤, 세계 첫 로봇 격투 대회가 잇따라 열렸다. 모건스탠리는 앞으로 4년간 중국의 로봇 시장이 두 배 이상 성장해 글로벌 로봇산업에서 중국의 지배력이 공고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중국이 차세대 로봇 개발을 추진하는 세계 혁신 허브”라는 평가까지 내놨다.
중국은 국가 주도의 첨단 제조업 육성책인 ‘중국 제조 2025’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고 보고 빠르게 첨단 기술 산업 중심으로 제조업을 재편하고 있다. 지난달 중국의 산업용 로봇 생산량은 1년 전보다 35.5% 급증했다. 서비스 로봇 생산량은 13.8% 증가한 120만 대를 기록했다. 또 화웨이는 엔비디아를 대체할 수 있는 AI 칩 개발에 속도를 내고 있다.
하지만 화려한 중국의 기술 굴기 이면에 ‘또 다른 중국’이 있다. 중국 국가통계국에 따르면 중국의 지난달 소비자물가지수(CPI)는 전년 동월 대비 0.1% 떨어졌다. 중국 당국의 내수경기 부양에도 4개월째 마이너스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올해 중국의 CPI가 0%를 기록할 것으로 보고 있다. IMF가 조사 대상으로 삼은 약 200개국 중 가장 낮다. 전망대로라면 중국 소비자물가는 글로벌 금융위기 때인 2009년(-0.72%) 이후 16년 만에 최저 수준으로 떨어진다. 도매 물가인 생산자물가지수(PPI)는 더하다. 지난달 중국의 PPI는 전년 동월 대비 3.3% 떨어졌다. 32개월 연속 하락세이자 22개월 사이 최대 하락폭이다.
디플레이션 우려가 커진 것이다. 이미 소비심리가 얼어붙고 있다. 전기자동차를 비롯해 중국 기업들은 소비자를 붙잡기 위해 출혈경쟁을 벌이고 있다. 결국 제대로 이익을 내기 어려운 중국 기업들이 채용을 줄이기 시작했다. 최근 청년 실업률이 최악의 수준으로 치솟은 배경 중 하나다. 중국에선 매년 1000만 명이 넘는 대학 졸업생이 배출되고 있다. 디플레 우려에 더해 미·중 관세 전쟁까지 겹치며 불안해진 기업들은 취업문을 여는 데 소극적이다. 중국의 16~24세 청년 실업률은 4월 기준 15.8%에 달했다. 중국 전체 실업률(5.1%)의 세 배를 웃돈다. 올여름엔 역대 최대인 1222만 명의 대학 졸업생이 취업 시장 진출을 앞둬 청년 실업률이 더 높아질 가능성이 크다.
물가 하락에 실업률 치솟아
중국 경제의 이 같은 양면성은 경제 성장이 ‘고속’에서 ‘중속’으로 낮아지는 과정에서 나타난 필연적 현상으로 분석된다. 한때 10%를 웃돌던 중국의 연간 경제성장률은 최근 몇 년 새 5% 안팎에 머물고 있다. 값싼 노동력과 대규모 자원 투입 중심의 기존 성장 공식이 한계에 다다르고 있어서다.
중국 정부는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고품질 발전’이란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을 들고나왔다. 첨단 기술을 활용한 생산력 향상이 핵심이다. 미국을 비롯한 각국의 보호무역주의, 공급망 대란 등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불가피한 선택이다.
중국은 미국과 패권 경쟁이 거세지는 전기차, 반도체, 배터리, AI, 로봇 등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데 전력투구하고 있다. 천문학적인 산업 보조금을 쏟아부었고, 연구개발(R&D) 투자와 인재 육성에 공을 들였다. 그 덕분에 ‘중국 제조 2025’에 명시한 핵심 기술 10개와 2018년 추가한 AI 분야 가운데 전기차·배터리, 드론, 고속철, 신소재, 태양광 패널, 5세대(5G) 이동통신, 전력설비 등 최소 7개 분야에서 세계 1위 기업을 배출했다.
하지만 첨단 기술 산업은 인프라 투자나 부동산 개발 등 전통적인 경기 부양책에 비해 고용 창출과 성장률을 높이는 효과는 상대적으로 작고 이는 결국 내수 악화로 이어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정된 자원을 첨단 기술 산업에 집중 투입하다 보니 사회 안전망 확충이나 가계 소득 증가 등 내수 중심 경제로 가기 위한 정부 지원도 상대적으로 소홀하다.
특히 내수 위축의 가장 큰 원인인 부동산 침체가 지속되고 있다. 중국의 부동산시장 둔화는 장기화 국면에 접어들었다. 올 1~5월 부동산 개발 투자는 전년 동기 대비 10.7% 줄었다. 신축 주택 판매(면적 기준)도 2.9% 감소했다. 지난달 중국 상위 100대 부동산 개발사의 신규 주택 판매는 8.6% 줄어든 2946억위안(약 56조원)에 그쳤다. 지난달 중국 70개 도시의 신규 주택 가격은 전월 대비 0.22% 떨어져 7개월 만에 최대폭 하락했다. 중고 주택 가격 역시 0.5% 하락해 8개월 만에 가장 큰 낙폭을 보였다.
지난해 9월 이후 중국 정부가 모기지 금리 인하, 주택거래 규제 완화, 계약금 비율 인하, 미분양 주택의 사회주택 전환 추진 등 부동산시장 활성화 대책을 내놨지만 큰 효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미·중 무역 갈등과 경기 둔화 우려에 따른 소비자의 불안 심리가 경제 전반에 퍼져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대중 견제 방식이 달라진 점도 경기 부진에 영향을 미쳤다. 조 바이든 행정부 때는 핵심 산업 보호를 목적으로 전기차, 반도체, 태양광 등 중국의 특정 첨단 산업에만 높은 관세를 부과했다. 하지만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는 모든 중국산 제품에 고율 관세를 부과하고 있다. 이 여파로 가뜩이나 내수가 좋지 않은 상황에서 수출 경기마저 타격을 받고 있다.
속수무책 디플레, ‘차이나 쇼크’ 우려
미국과의 무역 전쟁이 다소 누그러지더라도 중국의 디플레이션 압력은 완전히 해소되기 어려울 전망이다. 이미 디플레이션이 고착돼 중국 정부의 재정정책이나 통화정책만으로 해결이 쉽지 않아서다. 이에 따라 디플레이션 압박이 내수를 억누르고, 소비 침체로 기업 이익과 고용이 축소돼 다시 디플레이션을 키우는 악순환이 나타날 것이라는 우려가 적지 않다. 시장에선 중국 경제가 일본식 장기 불황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이른바 ‘차이나 쇼크’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올 들어 중국 정부가 부랴부랴 내수 활성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리스크는 여전하다. 기준금리 인하나 대규모 채권 발행, 소비재 ‘이구환신’(낡은 제품을 새것으로 교체 지원) 프로그램 등 각종 소비 진작책 효과가 제대로 나타날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 기업들은 ‘밀어내기식 수출’에 매달리는 경향마저 나타나고 있다. 안 그래도 중국산 저가 제품으로 혼탁해진 철강, 전기차, 배터리, 석유화학 등 전 세계 주요 산업이 더 심한 출혈 경쟁에 직면할 수 있는 것이다. 김재덕 산업연구원 베이징지원장은 “중국 소비자의 직접적인 소득 증대를 위한 중국 정부의 정책이 부족한 게 현재 시점에서 가장 큰 원인일 수 있다”며 “대규모 사회보장 확대, 첨단 기술 산업 이외의 공공투자 확대를 통한 일자리 창출과 최저임금 인상 등으로 전반적인 소득 증대를 유도해 구매력을 확대해야 디플레이션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
베이징=김은정 특파원 ke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