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키 17’은 땀내 나는 사람들로 채워 나간 현실감 있는 공상과학(SF) 영화입니다. 영화를 볼 여러분이 언젠가 가까운 미래에 맞닥뜨릴 수 있는 그런 얘기죠. 인간 냄새 물씬 나는 새로운 느낌의 ‘사이파이(sci-fi·공상과학)’ 영화라 저 자신도 기대가 큽니다.”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로 시작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안긴 ‘기생충’까지 봉준호 감독(56)이 보여준 영화적 미학은 언제나 ‘삐딱한 휴머니티(인간성)’로 요약된다. 6년 만에 내놓는 여덟 번째 장편 ‘미키 17’ 역시 ‘인간성 상실 시대에 존엄하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묻는다. 제작비만 1억5000만달러에 달하는 블록버스터 SF 영화지만, 봉 감독은 20일 서울 한강로3가 CGV용산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신작 소개를 이렇게 갈음했다. “과학에 관심이 없는 터라 그런 얘긴 다 뺐어요. 우리끼리 ‘발 냄새 나는 SF’라고 할 정도로요.”
○ ‘이야기꾼’ 봉준호가 비튼 복제인간 미키
오는 2월 28일 한국에서 세계 최초로 개봉하는 ‘미키 17’은 충무로뿐 아니라 미국 할리우드에서도 올해 최고 기대작 중 하나로 꼽힌다. ‘익스펜더블(소모품)’이란 이름으로 우주 행성 개척에 투입돼 궂은일을 도맡는 복제인간 미키(로버트 패틴슨 분)의 삶을 그린 미국 작가 에드워드 애슈턴의 SF소설 ‘미키7’이 원작이다.
원작 세계관이 강렬하거나 많은 제작비가 투입되면 감독의 색깔이 사라지기 쉽지만 ‘미키 17’에는 봉준호의 색채가 여실히 느껴진다. 이날 봉 감독이 “이세돌이 알파고를 이긴 ‘신의 한 수’처럼 인공지능(AI)도 절대 쓸 수 없는 시나리오를 밤새 고민한다”고 밝혔을 정도로 각본 작업에 신경 썼기 때문이다. ‘설국열차’와 ‘기생충’에서 드러난 보이지 않는 계급에 대한 문제의식이 신작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 기존 블록버스터 SF 영화들과 차별화되는 지점이다. 봉 감독은 “계급 투쟁이라는 거창한 정치적 깃발을 들고 있지 않지만, 전작들처럼 계급 문제가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다”며 “사회나 정치 문제를 심각하면서도 유머러스하게 풍자할 수 있다는 게 SF의 매력”이라고 설명했다.
이날 간담회에 앞서 약 10분 분량으로 선공개된 영화에선 ‘봉준호식 비틀기’가 곳곳에 나타났다. 원작에서 역사 교사인 주인공 미키가 영화에선 마카롱 가게를 열었다가 망하고 사채업자에게 시달리는 도시빈민인 게 대표적이다. 작업 중 사망할 가능성이 높은 위험한 일을 하거나 생체실험에 쓰이는 복제인간의 삶을 선택한 미키의 처지가 선명하게 와닿는다. 원작에선 7번째인 미키의 삶을 17번째로 늘린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미키는 ‘죽는 게 직업’인 인물로 가장 극한에 놓인 노동자 계층이잖아요. 7번보다 10번은 더 죽어야 불쌍한 노동자의 느낌을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 로버트 패틴슨 “봉준호는 배우들 로망”
이날 봉 감독과 함께 간담회에 참석한 배우 로버트 패틴슨의 연기도 돋보인다. ‘트와일라잇’ 시리즈나 ‘더 배트맨’ 등에서 보지 못한 가볍고 어딘가 모자라 보이는 연기를 선보인 그는 봉 감독이 시나리오를 구상할 때부터 점찍은 배우다. 봉 감독은 “슈퍼히어로 영화에도 출연했지만 ‘굿타임’ ‘라이트 하우스’ 같은 독립 영화에서도 놀라운 연기를 선보였다”며 “약간 멍청하고 불쌍한 17번째 미키와 예측불가능하고 기괴한 카리스마를 뿜어내는 18번째 미키를 커버하는 1인 2역을 해낼 수 있는 연기력”이라고 했다.
할리우드 ‘블루칩’ 배우인 패틴슨도 봉 감독의 연출력에 엄지를 세워 보였다. 그는 “지금 세계에서 배우들이 일하고 싶은 감독을 뽑는다면 4~5명 안에 봉 감독이 들어간다”며 “캐스팅 제안을 받았을 때 곧바로 손을 들었다”고 말했다.
‘미키 17’은 다음달 개막하는 ‘제75회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세계 처음으로 상영된다. 6년 만에 돌아오는 봉준호 신작의 최대 관전 포인트는 무엇일까. 봉 감독은 “25년 감독 경력 최초로 러브스토리가 나와요. 멜로영화라고 하면 좀 뻔뻔스럽겠지만, 사랑의 장면들이 있는 점이 개인적으론 뿌듯했습니다.”
유승목 기자 mo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