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효림의 베스트셀러 레시피] |
| 많은 사람들에게 뜨거운 사랑을 받는 베스트셀러. 창작자들은 자신이 만든 콘텐츠가 베스트셀러가 되길 꿈꾸지만, 실제로 실현될 가능성은 극히 낮다. 이 희귀한 확률을 뚫고 베스트셀러가 된 콘텐츠가 탄생한 과정을 들여다본다. 창작자의 노하우를 비롯해 이 시대 사람들의 욕망, 사회 트렌드 등을 확인할 수 있다. |
책 한 권이 5.4㎏. 판형은 일반 책의 두 배 크기. 2424쪽에 두께는 13.8㎝.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 백치, 악령,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지식을만드는지식)이다. 도스토옙스키(1821~1881)의 4대 장편을 한 권에 담은 것. ‘벽돌책’을 압도하는 ‘바위책’이다.
올해 4월 출간된 이 책은 두 달 만에 1820권이 판매됐다. 가격은 29만8000원. 펀딩 플랫폼에서는 이보다 낮은 가격에 판매됐다. 네 작품은 김정아 박사(57)가 번역했다. 독자들은 “보고 있으면 미소가 절로 지어진다”고 말한다.
도스토옙스키 4대 장편을 한 사람이 번역하고 이를 엮어 합본호로 만든 대형 프로젝트는 10년이 걸렸다.
김 박사를 2일 서울 강남구 스페이스눌 사무실에서 만났다. 그는 패션기업 스페이스눌 대표이사다. 김 박사는 서울대 노어노문학과를 졸업하고 러시아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으로 건너가 일리노이대 어배너 섐페인 대학원 슬라브어문학부에서 석사 학위를, 동대학원에서 슬라브 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죄와 벌’로 박사 논문을 쓴 도스토옙스키 전문가다.
패션에 관심이 많은 김 박사는 지인의 부탁으로 패션회사 이사를 맡았다가 회사가 어려워지자 경영을 하게 됐다. 1~2년만 하면 될 줄 알았는데 계속 회사를 운영하게 됐다. 스페이스눌은 데바스테 등 해외 유명 브랜드를 들여와 유통한다. 커뮤니케이션북스 최정엽 전무이사(65), 최수연 편집자(48), 김예은 편집자(28)는 이날 서울 성북구 커뮤니케이션북스 사무실에서 만났다. 지식을만드는지식(지만지)은 커뮤니케이션북스의 출판 브랜드다.
김 박사는 2008년부터 도스토옙스키 작품을 발췌해 번역했다. 박영률 커뮤니케이션북스 대표는 김 박사의 편역을 눈여겨보다 도스토옙스키 4대 장편 완역을 제안했다. 기업 대표에 세 아이의 엄마인 김 박사는 “무리일 것 같다”며 거절했다. 하지만 뒤이은 박 대표의 말에 전율했다. “선생님 번역에서는 도스토옙스키와 교감하는 영혼의 스파크가 느껴집니다. 번역자의 뇌와 도스토옙스키의 뇌가, 영혼의 탯줄로 연결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도스토옙스키가 인생의 나침반이자 스승이기에 ‘도 선생님’이라 부르고 ‘도스토옙스키 전도사’를 자청하는 김 박사에겐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대입 논술 고사 준비를 위해 ‘죄와 벌’을 읽고 사로잡힌 소녀가 도스토옙스키에 빠져들어 공부하다 망망대해를 홀로 건너는 여정에 뛰어든 순간이었다. 김 박사는 “‘죄와 벌’을 읽으며 10대 딸 소냐가 몸을 팔아 번 돈으로 술을 사먹는 마르멜라도프마저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에 망치를 머리에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김 박사는 매일 오후 8시경 잠자리에 든 뒤 새벽 2시에 일어나 4~5시간 가량 번역하는 작업을 10년간 이어갔다. 그는 “몸과 마음을 모두 갈아 넣었다”며 웃었다. 두 딸을 키우며 미국에서 공부하느라 오후 8시에 딸들과 잠든 뒤 새벽 1, 2시에 일어나 공부하는 게 습관이 됐다고 한다. 그는 “(얼마나 방대한 작업인지 몰라) 무식해서 용감했던 것 같다”며 웃었다.
러시아 모스크바의 순수문학을 담당하는 정부 출판사에서 1956년 발간한 도스토옙스키 전집 제5, 6, 7, 9, 10권을 원전으로 삼아 옮겼다. 김 박사는 영어 러시아어 중국어 일본어 스페인어까지, 6개 언어를 한다. 그는 “언어를 공부하는 게 정말 재밌다”고 했다.
낮에는 회사를 운영하고 새벽에 번역하는 건 만만치 않았다. 온 몸에 통증이 생겨 복대를 두르고 손목 보호대, 손가락 지지대, 팔꿈치 받침대까지 쓰며 ‘부상 투혼’을 이어갔다. 그럼에도 김 박사는 “도 선생님을 만나는 새벽 시간이 기다려졌다”고 말한다.
고비도 있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번역할 때였다.“이반의 사상과 고뇌가 담긴 5장을 번역할 때 도 선생님이 피를 토하듯 고해성사를 한다는 확신이 들었어요. 뇌전증을 앓았던 선생님은 세 살 아들을 뇌전증으로 잃었습니다. 아장아장 걷던 아이가 갑자기 발작을 일으키다 숨진 거예요. 그 고통이 가늠조차 되지 않습니다. 선생님이 평생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아름다운 사람을 그리려 애쓴 건 아름다운 존재를 다시 세상에 세워 파괴되지 않게 하고 싶었던 거예요. 숨을 쉴 수가 없고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졌습니다. 최 전무님에게 ‘더 못하겠어요. 죽을 것 같아요’라고 했어요.”
김 박사는 너무 많이 울어서 눈의 흰자위가 부풀어 올랐다. 안과에 가니 의사는 약을 처방해주며 “4주간 울지 마세요”라고 했다. 번역을 중단하고 그저 걸었다. 일주일이 지나지 않아 다시 작업을 했다.
그는 번역을 하며 네 작품이 완벽한 기승전결을 이루는 거대한 서사라는 걸 깨달았다. 도스토옙스키는 1849년 혁명적 사상을 펼치던 페트라솁스키 모임에 참여해 처형될 뻔하다 간신히 목숨을 건진다. 시베리아 옴스크 노동 감옥에서 지내며 사회적 죽음을 경험한다. ‘죄와 벌’에서 라스콜리니코프는 시베리아에서 소냐와 함께 다시 태어난다. ‘백치’에서 선한 영혼을 지닌 미시킨 공작은 세상에 의해 부서진다. ‘악령’은 예수가 파괴된 이후의 세계를 그린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는 죽음을 통과한 생명에 대한 찬가를 담았다.
김 박사는 “4대 장편은 부활에서 실패로, 파괴를 통과해 다시 생명으로 회귀하는 거대한 영혼의 파노라마를 완성한다. 인간 구원을 향한 집요하고도 숭고한 열망이 빚어낸 한 편의 대서사시”라고 했다.
김 박사는 번역을 하며 마음이 더 단단해지고 연민의 눈으로 사람을 보게 됐다.
“저는 불안감이 크고 열등감이 많았어요. 10번 노력해서 2, 3개를 얻으면 ‘왜 이것뿐이지’라고 생각했죠. 지금은 10번 노력하는 것 자체가 큰 재능이라고 여기게 됐습니다. 경영을 하며 무례한 사람들에게 상처를 많이 받았어요. 예전엔 무례하면 나쁜 사람이라 여겼는데 이젠 무례한 사람은 아픈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새벽을 바친 대신 영혼을 넓혔습니다.”

김 편집자는 합본호 제작에 6개월을 꼬박 매달렸다. 해설, 삽화도 함께 담긴 합본호는 판형이 가로 20.5㎝ 세로 29㎝로 일반 책의 두 배 크기다. 양장본에 24K 금박으로 글씨를 찍었다. 도스토옙스키 얼굴 부조도 표지에 붙였다. 김 편집자는 부조를 잘 만드는 업체를 찾아 부산까지 갔다. 책의 세 면은 금장을 입혔다. 책 가름끈도 4개다. 종이는 얇으면서도 뒷페이지 글씨가 비치지 않도록 별도로 제작했다. 큰 판형에 맞게 글씨와 삽화가 또렷하게 인쇄되도록 숯가루를 섞은 특수 잉크를 사용했다.
책이 워낙 크다보니 종이를 묶어 표지를 붙이고 금박을 입히는 등 제작 과정 대부분을 수작업으로 했다. 이 크기에 맞는 기계가 없기 때문이다. 김 편집자는 “책을 처음 봤을 때 너무 커서 당황했다. 독자들이 좋아하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했다”고 말했다. 종이가 떨어지지 않도록 책의 튼튼함에도 신경을 많이 썼다.
“제본소 대표님에게 책이 찢어지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어요. 그러자 대표님이 책을 바닥에 마구 패대기치시더니 ‘보세요. 안 찢어지죠?’라고 안심시켜주셨어요.(웃음)”(김 편집자)
독자는 40, 50대가 많고 남성과 여성이 절반 정도다. 일반적으로 책 구매자는 여성 비율이 월등히 높은 것에 비하면 이례적이다. 합본호가 화제가 되면서 일러스트판도 주목받고 있다.

합본호 제작에 앞서 2020년 ‘죄와 벌’을 시작으로 4대 장편을 고급 양가죽에 24K 금박을 입힌 한정판으로 각각 제작했다. ‘죄와 벌’ 100권(22만 원), ‘백치’와 ‘악령’ 각 150권(29만 원),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300권(35만 원). 모두 완판됐다.
처음 해보는 작업이어서 첫 책을 만드는데 1년 이상 걸렸다. 한정판을 담당한 최 편집자는 원하는 질감과 색상의 가죽을 구하기 위해 성수동을 수차례 갔다. 가죽 제본 전문점을 찾아 충무로를 뒤졌다. 고급스럽고 두툼한 책 가름끈을 구하기 위해 남대문 시장을 헤맸다. 책을 담는 상자를 구하려 방산시장도 드나들었다.
한정판은 금세 완판됐다. 청와대 대통령비서실을 비롯해 각계에서 추가 구매 문의가 이어졌다. 최 편집자는 “고급책을 원하는 수요가 있다는 걸 확인하고 놀랐다”고 했다. 최 편집자는 네 작품을 3차례 완독하며 교정 교열을 했다. 지금도 합본호 재쇄를 찍을 때 수정하고 주석을 추가하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최 전무는 “한정판과 합본호를 제대로 만들 수 있을지 염려했는데 완성도 높은 책이 탄생했다. 우리나라에 없던 책을 만든 게 의미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 박사는 번역 과정과 4대 장편에 대해 쓴 에세이 ‘도스토옙스키 번역 일기’(샘터)를 올해 4월 출간했다. 이들 작품을 안내하는 길잡이 같은 책이다. 그는 도스토옙스키와 관련된 에세이를 계속 쓸 계획이다.
저녁 약속을 하지 않고 술을 못 마시는 그는 인문학이 경영에도 큰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디자이너의 철학을 이해하고 업무 담당자와 인간적인 관계를 맺으면 오래 갑니다. 지난 10년간 한 해도 적자를 내지 않은 건 인문학적 마인드로 경영한 덕분이에요.”
그는 초청을 받아 조만간 러시아로 간다. 도스토옙스키의 생가, 그가 기도하던 옵티나 수도원 등을 방문하고 도스토옙스키의 후손도 만날 예정이다.
당분간은 쉰 뒤 ‘지하 생활자의 수기’를 완역할 계획이다.
“4대 장편이 나올 것을 알리는 포문 같은 작품이에요. 주인공이 ‘히키코모리’로 현대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죠. 번역을 하며 깨달았습니다. 인문학은 현실을 더 견디게 하는 힘이라는 것을요. 보다 많은 분들이 이를 경험하게 하고 싶습니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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