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주년 앞둔 고려대의료원
여학생 17명 조선女의학강습소, 고려대학교의료원-의과대학 모태
안암-구로-안산 잇는 의료 체계… ‘미래 100년’ 준비할 비전 선포
2028년 개교 100주년을 앞둔 고려대의료원이 다시 그 출발점을 들여다보고 있다. 신규환 고려대 의과대학 의인문학교실 교수(여성의학사연구소장)는 “단순한 학교 설립이 아니라 국내 최초로 여성 의료인을 양성할 수 있는 제도적 길이 열린 것”이라며 “의료 소외계층의 곁을 지켜온 100년의 시간이 곧 고려대의료원의 정체성”이라고 말했다.
19세기 말 조선에서 여성 환자가 남성 의사에게 진료받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유교적 관습 속에서 여성의 몸은 철저히 가려졌고 병을 키우거나 치료를 포기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의료의 사각지대는 곧 여성의 사각지대였다.
이 현실을 정면으로 마주한 인물이 미국 의료 선교사 로제타 셔우드 홀이다. 그는 단순 진료에 머무르지 않았다. 여성이 안정적으로 치료받으려면 여성 의료인이 있어야 하고, 그러려면 이를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교육기관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1910년대 일부 여성이 평양 광혜여원 부속 의학강습반이나 조선총독부의원 부속 의학강습소를 통해 제한적으로 청강할 기회를 얻었지만 1926년 경성의학전문학교가 여성 청강생을 더 이상 받지 않으면서 그나마의 통로마저 막혔다. 로제타 홀은 포기하지 않았다. 1928년 그는 창신동에 조선여자의학강습소를 설립했다. 교사 12명, 학생 17명의 작은 시작이었다. 학교 이름에 ‘경성’ 대신 ‘조선’을 쓴 것은 식민지 현실 속에서도 조선 여성 스스로의 힘으로 의료와 교육을 일으키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여성을 위한 의료 사업은 여성의 힘으로(Medical work for women by women).” 로제타 홀의 이 신념은 강습소의 설립 정신이 됐고 100년의 세월 동안 고려대 의과대학이 걸어온 길의 근간이 됐다.
우리 민족의 자부심으로 거듭나
1933년 로제타 홀이 미국으로 돌아간 뒤 독립운동가 출신 의사 김탁원·길정희 부부가 학교를 맡았다. 이들은 사재를 털어 학교를 관철동으로 이전하고 정식 의학전문학교로의 승격을 추진했다.
학교 발전의 결정적인 전환점은 민간에서 왔다. 전남 순천의 자산가 우석(友石) 김종익은 결핵으로 딸을 잃은 뒤 조선 의료의 열악한 현실을 절감했다. 1937년 임종 직전 전 재산 175만 원(현재 가치 약 2000∼4000억 원)을 사회에 환원했고 이 중 65만 원을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설립 기금으로 지정했다.그 결과 1938년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가 정식 개교했다. 일제강점기 당시 국내 의사 양성기관 가운데 순수 한국인 자본으로 세워지고 운영된 유일한 의학 교육기관이었다. 신규환 교수는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의 설립은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에 우리 민족에게 자부심을 심어준 장거”라고 평했다.
1928년의 정신, 100년의 약속
고려대 의과대학은 2022년 12월 국내 최초의 여성의학사 전문 연구기관인 ‘여성의학사연구소’를 개소했다. 연구소는 한국 의학사에서 충분히 조명받지 못했던 여성 의료인과 연구자를 발굴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식민지 시기 여성 위생학자, 해방 이후 여성 예방의학자, 한국 최초의 여성 해부학자 등 그동안 역사가 외면해 온 이름들을 하나씩 되살리며 의학사의 빈자리를 채우고 있다.
단순한 과거 복원이 아니다. 의학이 어떻게 소수의 전유물에서 보편적 권리로 확장돼 왔는지를 돌아보며 오늘의 의학이 가야 할 방향을 묻는 작업이다. 신 교수는 “100년의 역사를 되짚는 일은 과거 의료 사각지대에 놓인 이들을 향했던 시선이 여전히 유효한지 묻는 것”이라며 “고려대의료원은 한결같이 소외된 이들을 돕겠다는 인류애를 바탕으로 발전해 왔다”고 말했다.고려대의료원은 최근 ‘THE NEXT MEDICINE’ 비전을 선포하며 미래 100년 준비에 나섰다. 정릉 메디사이언스파크와 백신혁신센터, 동탄 제4고대병원을 중심으로 안암·구로·안산을 잇는 미래 의료 체계를 구축하겠다는 구상이다. 윤을식 의무부총장 겸 의료원장은 “시대가 바뀌어도 사람을 최우선 가치로 둔 환자 중심의 사고는 변하지 않는다”며 “사회적 책무와 윤리의식을 갖춘 미래 의료인 양성이 다음 100년의 과제”라고 강조했다.
100년 전 창신동의 작은 교실 하나가 한국 의료에 새 길을 열었다. 여성에게 닫혀 있던 의학의 문을 열었고, 의료가 누구를 위해 존재해야 하는지 시대적 질문을 던졌다. 고려대의료원이 다시 1928년을 돌아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미래 의학 역시 가장 소외된 사람들 곁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태초의 정신을 잊지 않기 위해서다.
최해진 기자 haeha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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