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공부 이룬것 없는데, 남들은 벼슬만 잘하는구나

1 hour ago 2

[한시를 영화로 읊다] 〈131〉 숫자에 담은 속마음

과거 사람들은 1부터 10까지의 숫자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곤 했다. 남조(南朝) 송나라 포조(鮑照·414∼466)는 숫자를 제재로 삼아 1부터 10까지의 숫자를 차례로 담은 작품을 남긴 바 있다.

현전하는 최초의 숫자 시로 숫자 1부터 10까지를 첫 글자로 삼아 썼다. 한 사람이 2년 동안 황제를 모시고, 한 해와 달과 날이 시작되는 삼조(三朝)의 국가 행사를 마친 뒤, 네 마리 말이 끄는 수레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모습, 그리고 출세한 이 한 사람을 구족(九族·자신을 기준으로 위로 4대, 아래로 4대의 직계친)이 애타게 기다리고 친구들도 선망한다고 읊었다.

숫자 장난이란 혹평을 받기도 했지만, 이 시는 단순한 숫자 유희를 위해 지은 작품이 아니다. 마지막 10이란 숫자에 이르러 시인은 마침내 속내를 드러낸다. 자신은 10년 동안 공부해도 이룬 것 없는데, 어떤 이는 벼슬만 잘해서 하루아침에 현달한다고 한탄했다. 시에 나오는 감천궁이 한나라 양웅이 ‘감천부(甘泉賦)’를 지어 황제에게 풍간(諷諫)했던 공간임을 고려한다면 당시 세태를 풍자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전기 영화 ‘글렌 굴드에 관한 32개의 단편’ 포스터. 이 작품은 숫자로 위대한 피아니스트의 이해하기 어려운 삶을 설명한다.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전기 영화 ‘글렌 굴드에 관한 32개의 단편’ 포스터. 이 작품은 숫자로 위대한 피아니스트의 이해하기 어려운 삶을 설명한다.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프랑수아 지라르 감독의 전기 영화 ‘글렌 굴드에 관한 32개의 단편’(1993년)에서도 숫자가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32개의 단편으로 굴드의 삶을 조명한 이 영화는 연주 음악과 관련자들의 실제 인터뷰, 그리고 숫자로 천재 피아니스트의 일생을 풀어낸다. 시처럼 숫자가 차례대로 제시되진 않지만 굴드를 설명하는 데 중요한 숫자들이 모두 활용된다. 굴드의 대표 연주곡인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의 총수인 32, 평생 집착했던 스타인웨이 피아노의 일련번호 CD318, 그리고 굴드가 두 숫자의 합이 불길한 13(4+9)이 된다며 죽음을 두려워했던 나이인 49 등이 그것이다.

시는 이후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청나라 건륭제가 이 시를 높게 평가해서 본뜬 작품을 여러 수 남긴 바 있다(‘數詩再效鮑照體’ 등). 영화 역시 독특한 형식의 전기 영화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영화가 굴드의 삶을 구성하는 단편들을 숫자와 연결시켜 제시했다면, 시는 숫자에 빗대어 시인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냈다. 가난한 선비가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한 감개를 담고 있다고 평가할 만하다.

임준철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 dongA.com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

Read Entire Article